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펠로우일기

다른 길을 찾아봐

슬기엄마 2011. 2. 27. 11:48

평범한 의사되기도 힘들다

 

작년 가을부터인것 같다. 나는 한달에 한번 꼴로 내가 4기 암을 진단받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나는 여기 저기를 찔러 조직검사를 해 놓고 초조하게 검사결과를 기다리다가 결국 수술이 불가능한 4기 진단을 받고 곧바로 항암치료를 시작한다.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점검해 보거나 내 인생의 과제를 어디까지 수행했는지 미처 돌이켜볼 틈도 없이 항암치료가 시작된다. 꿈 속인데도 항암제가 혈관을 타고 들어가는 느낌, 명치가 아리한 느낌, 구역감이 치밀어 오르는 느낌 이런 감각이 매우 예민하게 살아있어 식은 땀을 흘리며 깬다. 일어나서 흠뻑 젖은 베게를 보며 내가 항암치료 중이라 땀을 많이 흘리는건가, 병원으로 향하는 내가 과연 출근을 하러가는 건가, 항암제를 맞으러 가는건가 한참 헷갈릴 정도이다.

그렇게 수시간을 현실과 꿈을 구분하지 못하고 비몽사몽하는 동안, 감정적 에너지 소모가 심하다. 특히 가슴이 제일 얼얼한데, 마치 뭔가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이 내 심장이 제대로 뛰지 못하게 짓누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나를 멀찌기 떨어져서 보고 있는 또 하나의 내가 있는 것 같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그런 유체이탈적인 느낌이 흐릿해지면서 제정신이 드는데, ‘그래, 착하게 살자. 환자들한테 잘하자. 우리 환자들 모두들 이렇게 충격적인 경험을 한 사람들이고, 재발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영혼이 죽어갈지도 몰라. 몸은 나빠져도 영혼까지 암으로 짓눌리게 하면 안되겠다그런 새삼스러운 결심을 하곤 한다. 그래서 가끔 멍해질 때, 인생이 부질없다는 느낌을 받을 때, 아니면 누군가가 아주 미울 때, 내가 지금 완치될 수 없는 병으로 투병생활을 시작하게 된다면 내 마음에 걸리는 일, 무거운 짐으로 남아있는 관계들은 없는지 돌아보게 된다. 유치하면서 대안없는 몽상인 줄 알면서도 자꾸 상상해보게 된다.

 

몸이 아프다고 영혼까지 아프게 하지는 말아야지

 

오늘은 월요일 아침, 주말을 보내고 나니 환자 명단에 변동이 많다. 교수님 회진을 준비하며 프리라운딩을 돌고 있는 바쁜 와중에 문자메시지가 왔다. 어머니가 신장에 생긴 종양으로 입원하셨다는 후배 레지던트. 옆구리 통증을 호소하는 어머니 모습이 떠올라 자기 가슴에 피멍이 드는 것처럼 고통스럽다고바쁜 회진 발걸음이 저절로 멈춰진다. 뭐라도 한마디 답장을 보내야 하는데 아직 진단도 안되어 있고 사진도 못 본지라 뭐라 할말이 없다. 그래도 녀석이 너무나 애가 타서, 어쩔줄 몰라 나에게 매달린다는 느낌이 드니 뭐라고 한마디 해줘야 하는데

2주일간 입원했다가 오늘 퇴원하시는 의사선생님이 계시다. 사실 조마조마하지만 일단 퇴원하기로 했다. 서서히 좋아지실 거라고 격려해드렸는데 자신이 없으신가 보다. 회진 후에 따로 나를 좀 보자 하시며, 꼭 좋은 의사가 되라고 당부하신다. 그리고 눈물을 주르르 흘리신다. 아프고 나니까 눈물이 많아진다며 그냥 줄줄 눈물을 흘리신다. 나도 갑자기 눈물이 난다. ‘가을 학회 때는 꼭 좌장맡으시고 좌장보는거 사진 찍어서 보내주세요라며 선생님께 주문을 하긴 했지만, NPO 상태로 병원에서 생신을 넘기고 미음 몇 수저 겨우 드시는 상태에서 퇴원하시는 선생님이 너무 안쓰럽다. 암은 평등하구나. 누구나 똑같이 괴롭히는구나

 

평범한 종양내과 의사하지 말고 다른 길을 찾아봐

 

그렇게 마음이 무거워져서 회진을 마치고 방에 돌아와 메일함을 열어보니 미국에 연수간 선배가 오랜만에 안부메일을 보냈다. 청년의사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지 꽤 오래 되었는데, 이제야 알았나보다. 예전의 나를 아는 그는 이제 내가 문체도 그렇고 생각도 의사같다며, 죽음을 앞둔 사람과의 대화에서 뭔가 인간의 본성을 터치하는 인문학적인 글을 써보라고 운을 띄운다. 그리고 가슴을 후벼파는 한마디. ‘임종의학을 전공하는 의사, 우리나라에도 그런 종양내과 의사가 필요한 것 같아. 항암치료의 대상이 될만하면 환자를 보다가 그 선을 넘고 나면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는 종양내과 의사말고. 심지어 해주지 못하는 차원이 아니라, 아예 매몰차게 관계를 끊어버리는 그런 냉정한 종양내과 의사말고그냥 평범한 종양내과 의사하지 말고 다른 길을 찾아봐’. 아주 오늘 아침 연타속 홈런이다. 정작 나는 평범한 종양내과 의사짓도 제대로 못해서 허덕이는 형편인데, 내가 초라한 존재가 된 건지, 그가 그동안 나를 잘못 과대평가하고 있었던 것인지, 여하간 최소한 생각없이 함부로 살지 말라는 경고로 해석하는 것은 맞는 것 같다.

의대 입학하기 전에 사회학을 먼저 공부했다는 이유로 의대 공부에 깐죽거릴 수 없었다. 내 관심사가 순수 의학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 사회, 제도 등을 아우르는 비의학적인 영역에 더 많이 쏠려있다 하더라도 내가 의사의 신분으로 환자를 보는 신분인 이상 나는 철저한 의사여야 했고 정통 의학적인 견해를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10년을 지내다보니, 나를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드디어 내가 의사화된 것처럼 보이나 보다. 의사를 하려면 제대로 된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너무 강력하게 고수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별볼일 없는 내 존재의 가벼움에 초라함을 느끼고 자존감이 많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획기적인 아이디어나 손재주가 있는 것도 아닌데, 최소한 교과서적인 표준 치료에 당당할 수는 있어야지 싶으니 그만큼이라도 잘 해낼려고 하는데, 그곳에 이르기까지도 내게 요구되는 덕목이 첩첩 산중이라 절망스럽고, 뭔가를 이루기도 전에 자꾸 허물어지려고 하는 것 같아 큰일이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헛소리 안하고평범하게 살기도 버거운데, 이거 월요일부터 의기소침해지니 이번 한주 몸조심 해야겠다.

 

임상강사 1년을 보내며, 지금까지 달려온 속도에서 잠시 호흡을 멈추고 내가 살아온 최근의 시간들을 돌이켜보고 싶다. 잠시 다른 호흡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내가 너그러워질까? 전문의가 된지 1년이 되었다. 어쩌면 지금의 1-2년의 경험과 습관, 태도가 앞으로 의사로서 내 삶의 색깔과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시간이라면 자전거 핸들 방향이 어느 쪽으로 꺾여있는지 모른 채 무작정 최선을 다해 페달을 밟아 대는 것보다는, 잠시 자전거를 멈춰 세우더라도 허리를 곧추 세우고 내가 전진하려는 길이 제대로 된 방향을 향한 것인지 마지막으로 재점검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턴을 마치면서 레지던트가 되면 좀 더 나아질거라고 믿었고 레지던트 한년차 한년차 올라가면서 내년에는 분명히 더 나아질거야 믿었고, 전문의가 되고 나면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독립적인 개체로 우뚝 서게 될 줄 알았는데, 아직도 이렇게 허약해서 큰일이다. 할 일이 산더미지만, 이번 설 연휴 때는 책과 음반을 잔뜩 싸들고 어디론가 잠적해서 최소한 1년치 마음의 양식은 쌓고 병원으로 복귀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