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펠로우일기

어쩜 저런 의사가 있나/어쩜 저런 환자가 있나

슬기엄마 2011. 2. 27. 11:45

일요일 오후 나는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 논문의 자료를 정리하기 위해 병원에 남아 있다. 주말이나 되어야 한숨 돌리고 내 일을 챙기게 된다. 나이가 먹어서인지 워밍업 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내 고민이 어디까지 진행되고 있었더라리듬을 찾는데 한참 시간이 걸렸다.

 

이제 겨우 집중할 수 있게 되었는데 병동에서 전화가 온다. 어떤 환자의 보호자가 **** 교수님 담당 fellow를 찾는다는 것이다. 환자 얼굴에 피부 병변이 생겼는데 그걸 어떻게 해야하는지 상의하고 싶다는 것이다. 병동 간호사는 피부 병변이면 직접 보지 않고 판단하기 어려우니 응급실이라도 내원하시는게 좋겠다는 말을 했는데도 꼭 의사랑 통화를 하게 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아무리 사소한 변화라도 환자와 가족들은 불안할 수 있겠지…’ 병동에서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어본다. 받지 않으니 내심 다행이다 싶어 전화를 끊는다. 그래도 왠지 찜찜해서 30분쯤 지나 다시 한번 전화를 걸어본다. 젊은 여자. 딸인가보다. 요점은 자신은 지금 외국에 있는데 환자에게 몇일전 피부병변이 생겨서 얼굴이 붓고 진물이 나는데 이것이 암과 관련되어 있는 것인지 아닌 것인지 묻는 것이었다. 환자를 직접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는 대답을 하는데도 계속 환자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 “동네 피부과에서는 대상포진이라고 했다는데 동네 피부과는 암 환자를 본 경험이 없으니 잘 모르는 거 아닌가요?” “아니 그럼 거긴 왜 가셨어요? 바로 종합병원 피부과를 가보던지 우리병원 종양내과 진료를 보던지 하시지” “저희 어머니가 대학교수이신데 바쁘시고 병원 가기도 싫어하시고 집도 멀어서요” “집이 어디시죠?” “수유동이요나는 순간 맥이 빠지고 기분이 나빴다. “지금 가면 봐주실 수 있나요? 선생님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면식도 없는 의사에게 전화로 환자가 지금 응급실로 가면 와서 봐 달라는 전화를 하고, 그것을 당당하게 요구하며, 내 이름을 묻는 행위에 당황스럽다. 전화를 하면 초 단위로 상담비를 계산한다는 미국 변호사 얘기를 할 것까지는 없겠지만, 이렇게 요구하는 것은 너무 무례한 것 아닌가?

나는 얼떨결에 그 환자를 진료하기 위해 지금 병원에 남아있게 되었다. 어차피 병원에 있을 거니까 환자가 응급실오면 한번 가서 봐주지 가볍게 생각했는데, 생각할수록 괴씸하다. 보호자에 휘둘려 갑자기 내 시간, 지식, 노력에 대한 어떤 보상도 없는 의료행위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내 자리 전화기가 울린다. 그 딸이다. 한시간쯤 후에 응급실에 도착할 거란다. 내 시간과 공간에 마음대로 개입하는 그녀가 갑자기 미워진다.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환자라도, 환자가 요구하면 무조건 그것에 응해야 하는가, 정석대로 진료를 받으라고 하지 않고 응급실로 오시라고 대답한 내가 싫어진다. 내가 잘못한 것이다.

 

정석대로라면 나는 병동의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되었고, 병동 간호사가 알려준 전화번호로 전화를 하지 않아도 되었고, 전화를 했더라도 내가 일요일 오후 응급실로 직접 가서 환자를 볼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정석대로라면 환자는 암과의 관련성이 의심되고 불안했으면 병원 외래에 내원하여 종양내과와 피부과 진료를 보고 필요하면 조직검사를 하여 조직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순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의사가 아니었던 시절, 특히 의료사회학을 공부하던 시절, 의사와 의료를 어떻게 생각했었는지, 어떤 점이 불만이고 문제점이라고 생각했었는지 자주 되돌이켜 생각해본다. ‘환자가 병과 관련하여 문제가 생기거나 불안할 때 의사한테 전화하면 안되?’ ‘환자를 보는데 일요일이 어디있어?’ ‘다른 병도 아니고 머리로 전이된 암을 가진 말기 암환자인데 얼마나 마음이 다급하겠어?’ ‘병원에 있으면서도 내려와서 환자를 보지 않겠다는거야? 의사로서 자질이 있는거야?’ ‘응급실에 가서 제대로 진료를 받으려면 얼마나 오래 기다리고 힘든지 알아?’ ‘환자도 자기 할일이 있는 사람인데 병원에서 그렇게 일방적으로 대우해도 되는거야?’ 아마도 내가 의사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항의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와 지금, 의료사회학을 공부하던 시절과 의사가 되어 의료현장에서 일하는 요즘, 이 두 간극은 매우 멀리 떨어져있고, 이를 좁히기 위해서는 참으로 많은 변화와 노력이 필요할텐데 그 답을 쉽게 얻기 어렵다. 나는 개인적 차원에서, 일단 내가 진료하는 환자, 내가 만나는 환자에게 그런 불만이 없기를 바라는 소박한 마음으로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한다.

그렇지만 환자도 환자로서의 예의를 지켜야 한다. 환자는 권리도 있지만 의무도 있고 예의도 갖추어야 한다. 자신의 요구가 제대로 충족되지 않으면 의사와 병원을 비난하거나 고발해 버림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당연시 인정받으려고 하는 환자나 보호자를 만나면 정말 화가 난다. ‘인터넷에 올려버리겠다며 협박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왈가왈부 하기보다는 마음내키지 않아도 환자의 입장에서 일을 처리해 줄려고 이리저리 애를 써서 방법을 마련해놓으면, 어째 일이 이리 더디냐, 내가 원하는건 이런게 아니었다며 불만을 토로하고, 이제는 활성화되어버린 고객상담실에 불만건수로 접수를 해버린다. 굳이 그렇게까지 애써줄 필요가 없었던 일에 노력을 기울이다가 오히려 뺨 맞는 꼴을 당하는 것이다.

정석대로하는 의사를 만나 벙어리 냉가슴으로 묻지도 못하고 쩔쩔 매는 환자들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1 1초도 더 시간을 내어주지 않는 의사들을 원망한다. 나는 그들의 편을 십분 이해하는 의사가 될 줄 알았다. 의사가 아니던 시절, 어쩜 저런 의사가 다 있나 싶었는데, 의사가 되고 보니, 어쩜 저런 환자, 저런 보호자가 다 있나 싶다. 적절한 의사-환자 관계의 형성은 단지 인성교육이나 태도의 문제, 혹은 역지사지의 입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