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펠로우일기

의사가 환자되면, 그냥 '환자'다

슬기엄마 2011. 2. 27. 11:39

 

내가 의대생, 레지던트일 때는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던 선생님이 나의 환자가 된다면? 그래서 그의 문제를 진단하고 나의 실력과 재능으로 수술을 하거나 술기를 시행하여 증상을 호전시키고 완치시킬 수 있다면? 정말 뿌듯할 것 같다. 선생님도 당신 제자가 그만큼 능력있는 의사가 되었으니 스승으로서 뿌듯할 것이고, 나도 예전에는 선생님 눈도 못 마주치는 햇병아리였는데 당신 몸에 손을 대고 이곳 저곳을 주무르며 진단과 치료를 할 수 있는 의사가 되었으니 솔직히 으쓱할 것같다. 생각만 해도 우쭐해진다.

그러나 나는 종양내과 의사라서 그럴 일이 별로 없을 것 같다. 내가 보는 환자 중에 완치를 기대할 수 있는 경우는 수술 후 재발방지를 위한 보조항암요법을 받는 환자들인데, 이들이 완치를 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는 수술 때문이지 항암제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아주 드물게 4기 환자 중에도 항암치료를 하는 중에 CT 등의 영상검사에 병이 눈에 보이지 않게 없어지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완치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에 불안한 마음을 떨치기 힘들다. 대개의 환자들은 일단 전신상태가 괜찮으니 항암치료를 하면 일시적으로 병이 호전되지만 궁극적으로는 병이 다시 나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항암치료를 받지 않는 나머지 환자들은 항암치료가 더 이상 의미가 없기 때문에 항암제가 아닌 다른 보조적인 방법으로 증상을 완화시키는 치료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선생님을 진료하게 되는 경우는 그다지 좋은 상황이 아니고, 우쭐거릴 만한 상황은 더더욱 아니며, 어쩌면 다른 의사-환자 관계보다 더 어색하고, 심리적으로 어려움이 많을 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으로서 강한 모습, 예전의 당당했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 항암치료를 받으며 견디고 있는 지금의 당신 모습을 더 참기 힘들어 할지도 모르겠다.

 

의사들이 가장 꺼려하는 환자는 의사-환자

의사들이 진료를 가장 꺼리는 환자가 바로 의사-환자(원래는 의사인데 환자가 된 사람)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까지 함께 한 사이이니, 얼마나 진정으로 잘 돌봐줘야 하겠는가. 그러나 의사환자에게는 검사 하나만 하려 해도 보통 환자한테보다 설명도 훨씬 더 자세히 해야 한다. 검사 중 합병증도 없어야 하고, 검사 결과도 잘 나와야 한다는 말도 안되는 부담감에 시달린다. 같은 의사끼리니까 어려운 의학용어도 척척 이해하고 의학이라는 학문의 존재적 불확실성도 잘 이해하기 때문에 일반 환자를 진료하는 것보다 말도 잘 통하고 이해도도 높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 전공이 다른 의사들끼리는 말도 더 안 통하고, 어줍잖게 알고 있는 옛날 지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면, 그걸 무시할 수도 없고 안 들어줄 수도 없고 대략 난감이다. 환자가 주장하는 강도도 높고 고집도 세고 그런 와중에 주위의 지인들로터 엄청난 압력까지 동반되면 짜증 동반이다. 평생을 의사로 살아온 환자는 자존심이 세고 병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 몸과 마음은 지칠대로 지쳐 쓰러지기 일보직전의 예민함으로 똘똘 뭉쳐있고 가족들은 환자가 의사이니 그를 통제하지도 못한다. 게다가 그 병이 암이라면 상황은 더욱 좋지 않다.

불행히도 암은 발생율만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암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즉 유병율도 지속적인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생존자가 많아졌기 때문에 유병율이 높아진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하간 주위 아는 사람들 중에 암 환자도 많고 항암치료를 받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내가 진료하는 환자가 의사이거나 아니거나, 대통령이거나 아니거나 상관없이 똑같이 진료해야하는 게 원칙이겠지만, 여하간 의사-환자는 솔직히 신경쓰인다. 종양내과의사로서 낫지 않는 암으로 기약없는 항암치료를 해야 하는 의사-환자를 보는 일이 아직은 어렵다. 환자가 자신의 예후나 치료의 어려움에 대해서 비교적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추상적으로 얼머무려서 달랠 수도 없는 일 아니겠는가.

 

그래도 환자는 환자다

VIP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듯이, VIP니까 검사도 덜 하고 보통의 과정을 뛰어넘거나 과도하게 진행하다가 오히려 환자에게 나쁜 일이 생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나는 가능한 환자가 된 의사선생님께 ‘VIP syndrom을 우려하여, 다른 환자분들과 똑 같은 과정으로 검사하고 치료하겠습니다. 이해하실 수 있도록 설명은 얼마든지 자세히 해드리겠지만, 담당 의사인 제가 보기에는 이러이러한 검사와 과정을 다 거치며 다른 환자들과 똑같이 고생하시는 것이 나중을 위해서 탈이 없을 것 같습니다. 검사 및 치료방침을 결정하는 과정에 환자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는 있겠지만, 최종 결정은 담당 의사인 제가 하는 것이니 제가 결정하면 그대로 따라주십시오라고 초반에 말하는 편이다. 조금 더 배려하려고 정규 코스를 벗어나는 순간에 환자가 나빠지는 걸 꽤 자주 목격했다.

신기하게도 진료 초반에 이렇게 나의 의견을 강력하게 피력하면, 환자가 된 노 선생님들이 고분고분 따라주신다는 점이다. 환자가 된 그분들 역시 담당 의사가 한번이라도 더 찾아와 주길 바라고, 오후 회진시간이 되면 내가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다. 당신도 이미 다 보고 알고 계신 CT사진과 피검사 결과에 대해 다시 한번 설명해 주고, 배라도 한번 만져주고 가기를 마음 속으로 바라고 있다. 나보다 훨씬 높은 교수님들이 진료하고 상의하여 진료계획을 세우기 때문에 나의 결정권은 별로 없지만, 약도 교수님들이 다 정해주시기 때문에 내 역할이 별로 없지만, 그래도 주치의가 환자 곁에 머무르고 진료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게 중요한가 보다.

암으로 투병중이신 선생님께 종양내과 후배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사실 그리 많지 않다. 다른 환자들과 똑같이, 아프면 진통제주고, 소화안되면 소화제주고, 입맛없으면 입맛나는 약 주고, 피검사해서 부족한거 채워주고 넘치면 뺴주고, 운동하시라고 자꾸 잔소리하고, 가장 중요한 항암제를 결정하는 것에서도 다른 환자 진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정해진 병기에서 표준치료하는 거고, 임상연구가 있으면 임상연구로 치료해보는 거고, 치료의 이득이 확실하지 않으면 일단 경과관찰하면서 증상조절하는 거고. 말 안듣고 고집피우면 혼내는 거고. 그러고 보니 하나도 다를 거 없는데, 괜히 부담만 가지고 있었구나 싶다.

환자가 된 의사선생님께 측은지심을 갖는게 적절한 감정인지 모르겠지만, 예전 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 환자복을 입고 투병중인 모습이 안쓰럽고 믿기지 않는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병동을 호령하고 우리를 혼내고 지적하고 잔소리하셨는데, 이제 그 잔소리를 어린 의사에게서 듣고 꼼짝 못하는 환자가 되셨으니 마음이 좋지 않다. 저만 믿고 열심히 치료하시면 좋아지실 수 있다고 큰 소리칠 수 있는, 그런 낙관적인 말을 할 수 없는 의사이다보니 어깨가 좀 움츠러든다.

별 수 있겠는가. 상태가 좋지 않은 환자는 자주 가보는게 왕도이다. 선생님이니 부담스럽지만 자주 가보고 상태보고 불편한 거 찾아서 해결해드리고 마음 편히 해드리는 거 정도 해드릴 수 밖에 없겠다. 이럴 때는 내가 종양내과인게 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