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죽음을 준비하는 환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사랑하는 이를 만날 때까지

슬기엄마 2012. 3. 5. 22:40


혈압이 떨어지고 열이 나서 응급실로 왔다.
얼마전 퇴원했을 때보다 환자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엄마 말을 들어보니
어제까지는 그럭저럭 괜찮게 지내셨다고 하는데
오늘 응급실에 와서 한 피검사 결과가 아주 좋지 않다.
남편은 지금 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고 계신다고, 내일 새벽에 서울에 도착하신다고 한다.
지난번 입원 때 나는 남편과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사실 그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이들 부부는 나보다 나이가 어리다. 얼굴도 예쁘고 마음도 예쁜 부부다.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우리 레지던트는 오늘밤에 돌아가실 수도 있다고 잔뜩 경고를 했나보다. 환자 랩을 보면 그렇게 생각이 들만도 하다. 남편 빼고 친척들이 잔뜩 모이셨다.
그렇게 나빠질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보기에는 괜찮을 것 같다.

그래도 가족에게 묻는다.

만약 오늘 밤이라도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심폐소생술은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엄마는 나를 외면하고 딸을 향해 기도만 하고 계신다.
남동생은 남편이 올 때까지 결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말을 흐린다.
환자는 기력도 없고 허리 통증도 심해서 이런 얘기를 할 상황이 아니다.

나는 CT, 피검사, 협진 그런거 다 하지 말라고,
그리고 서둘러 병동으로 자리를 옮겨달라고 응급실에 부탁한다.
환자 바로 옆 자리가 응급실 심폐소생술 하는 자리다. 환자를 안정시키고 편안히 주무시게 해드리는게 좋을 것 같다.

나는 그녀를 만난 이후로 어떤 치료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안할 생각이다.
그냥 편안하게 계시도록 할 생각이다.
그러나 병의 마지막에 이르면 편안하게 계시도록 하는 일이 매우 어렵다. 암은 그렇게 쉽게 컨트롤 되는 놈이 아니니까. 치료하지 않으면서도 증상을 조절해야 하니까 앞으로 어려움이 많을 것 같다.
그래도 난 그녀에게 항암치료를 하고 싶지 않다.
이제 그녀에게 더 이상 효과적인 약은 없다.

아직 연명치료포기각서를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밤새 나쁜 일이 생기면 안된다.
병동에 내 핸드폰 전화번호를 남겼다.

환자 나빠지면 전화해 주세요.

내일은 소변이 나오고
혈압도 좋아지고
환자 얼굴에 혈색도 돌고
그래서 사랑하는 남편을 만날 때 부인이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들에게는 그런 시간이 중요한 때이다.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밤도 무사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