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배가 높으신 선생님들은 늘 부담스럽고 관계가 어렵다.
항시 조심해야 한다. 나의 경거망동이 눈에 금방 띄니까.
그래서
인사 잘 하고, 네네 하는게 가장 무난하다.
뭐라 책망하셔도 네, 일 시키셔도 네, 마음속으로 오만 생각 다하지만 그냥 네 하는 편이다.
(물론 한창 피가 끓을 때는 나 나름의 의견도 개진하고 선생님들 생각에 반대하면 당당하게 반대도 해보고 했지만 경험끝에 결론적으로 내린 결론은 그냥 네 하는 것이다.)
그런 내가
진정 좋아하는 선생님이 있으니
바로 함께 유방암 환자를 진료하는 방사선 종양학과 선생님이시다.
선생님은 방사선 치료가 무기다.
방사선은 이래 저래 유용한 치료 전략이 될 수 있다.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께 자주 의견을 묻는다.
그런데
협진을 내면
방사선 치료가 별로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환자
다른 치료적 접근이 더 유용할 것 같은 환자로 판단되면
나에게 직접 전화를 하신다.
본인이 왜 방사선 치료를 하지 않으시려고 하는지 의견을 주신다.
(사실 어떤 과, 어떤 선생님은 협진을 내면 특별히 의견을 주지 않고 무조건 해당 프로시져를 해 버린다. 의견을 물어본건데 어느새 시술을 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선생님은
조금이라도 이견이 있을 것 같은 부분이 있으면 꼭 전화를 하셔서 내 의견을 물으시고,
왜 협진을 냈는지, 방사선 치료에 어떤 효과를 기대하고 있는지, 환자의 현재 상태를 컨트롤 하기 위해 항암치료의 효과는 어느 정도인지 그런 내과적 상황을 점검하신다. 물론 당신도 객관적인 정보를 다 알고 계시지만 주치의인 나의 의견을 묻는 것이다. 나를 비난하거나 부족한 판단력을 책망하시지 않는다.
방사선 치료보다는 더 낳은 대안을 소개해주시는 경우도 많다.
연배가 높으시지만, 고지식하거나 딱딱하지 않고 아주 사고가 유연하신 것 같다.
뭔가를 여쭤보고 때론 우기기도 하고 선생님과 의견교환을 하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다.
선생님께 무식한 질문을 하면서도, 이런 것도 모르고 질문하냐, 대체 공부는 하는거냐 이런 비난을 받을 것을 예상하거나 소심해지지 않는다. 그냥 모르는 것은 모르는 거라고 말씀드리고 질문한다. 또 선생님 의견에 당당하게 반대하기도 한다. 선생님은 나의 반박을 잘 받아주신다. 그리고 우리는 합리적으로 의견을 조정하여 '그럼 이렇게 해봅시다' 결정을 내린다.
특별히 모여서 집담회하는 시간 아니어도, 아무 때나 전화하고 메일보내서 의견을 교환한다.
선생님은 원내 교수들이 많이 모이는 회의에서도 솔직하게 문제의 본질을 지적하거나 질문을 많이 하신다. 다른 과에 문제제기를 할 때도 아주 소프트하시지만 꼭 할 말씀은 하신다. 경직되지 않고 솔직한 코멘트를 잘 하신다. 그런 유연한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연배가 높으신 만큼 경험이 많으시기 때문에 나의 섣부른 판단과 성급한 결정을 많이 교정해주신다.
이선생, 아직 이선생이 젊어서 그래. 일단 이건 이렇게 해보고 나서 판단해도 늦지 않아.
이런 코멘트를 해 주시면
그런가요? 그럼 그렇게 한번 해볼께요. 그때 다시 또 여쭤볼께요
그렇게 대답한다.
어려운 환자 케이스를 가지고 가서 선생님께 상의하는게 즐겁다. 과외를 받는 것 같은 기분이다.
다른 병원에서 10년이 넘게 항암치료를 받고 오신 분이 계셨다.
병이 피부에만 있다. 그런데 10년동안 낫지 않았다. 항암치료, 항호르몬치료 다 해봤지만, 조금씩 조금씩 병이 나빠지고 있었다. 더 이상 항암제를 쓸 수가 없었다. 모든 항암제를, 그것도 여러번 썼기때문에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피부암 치료하듯이 환자에게 방사선치료가 도움이 될지 문의드렸다.
선생님은 환자를 위해 특수 상자를 제작하였다.
방사선이 피부 병변에 골고루 조사될 수 있도록 상자 안에 물을 채우고 그 안에 투명 비닐로 덮은 팔을 넣어 물이 든 상자에 방사선을 쬐는 방식으로 치료하였다. 수년간 물집이 잡히고 뽀글뽀글 병으로 뒤덥혔던 피부 병변이 쪼그라들었다. 이 환자에게 많은 신경을 써 주셨다. 물론 지금은 환자 상태가 나빠져서 방사선치료는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지만, 환자는 3-4개월 병을 억제하고 사실 수 있었다.
선생님은 호스피스에도 관심이 많으시다. 그래서 우린 가끔 그런 얘기를 나누기도 한다.
엊그제는 선생님께서 나를 불러 아예 정식으로 호스피스 팀으로 들어와 같이 일하자고 제의하셨다. 나는 아주 기뻤다. 사실 병원 내에 ** 위원회에 이름이 걸려 있고 수많은 회의에 참석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모임에서 나는 별로 주체적이지 않다. 꿔다놓은 보리자루처럼 그냥 시간맞춰서 참석하고, 별로 적극적이지 않다. 그리고 너무 바쁘니까 무슨 모임에 참여하라고 하면 사실 좀 귀찮고 하기 싫다.
그런데 선생님의 제안이 너무 반갑고 감사하기까지 하다. 선생님이랑 이런 일도 같이 하면 더 좋겠구나 싶은 마음에 가벼운 설레임마저 생긴다. 우리 병원 호스피스는 그 역사가 오래 되었지만 아직 정식 예산도 편성되어 있지 않은 자원봉사적 성격이 강한 취약한 조직이다. 그래서 아주아주 부족함이 많다. 깝깝한 일이 산적해 있는 조직임에 분명하지만, 나를 초대해주신 선생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선생님과의 의기투합은
무엇보다 환자 진료에 큰 도움이 된다. 많이 배울 수 있다.
또 어떤 모임에 갈때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을 만나니 일상이 퍽퍽하지 않고 윤기가 있다.
연애하는 것도 아닌데 신이 난다.
연배가 높으신대도
진료 일선에서 누구보다 열심이시고
그 풍부한 경험을 후배에게 전수해 주시는 것이 우리 병원의 큰 장점 중의 하나일 것이다.
유방암 환자의 생존기간이 점점 길어지기 때문에,
잘 알려진 표준적인 치료나 방법으로는 잘 해결되지 않는 어려운 문제를 가진 환자들이 많다.
이들에게는 특별한 가이드라인보다는 경험과 연륜이 풍부한 선생님의 조언이 도움이 된다.
선생님을 존경하고 좋아하며 의기투합해서 일하는 경험, 상상할 수 없었다.
선생님으로부터
환자를 진료하는 태도를 배운다.
늘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시고
바쁜 와중에서도 간간히 여유롭고 풍요로운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실 때,
나는 마음 깊이 행복감을 느낀다.
아주 소중한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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