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시간을 못 지켜서 죄송해요....

슬기엄마 2011. 12. 1. 22:57


오늘은 면담의 날.

외래도 루틴대로 할 수 없는 환자가 많았다.
컨디션 확인하고 항암제 투약하면 되는 그런 단순 환자보다
뭔가가 어려워서 환자랑 상의할 것도 많고 어려가지 고려해야 할 것도 많고
몇분 안에 문제를 해결하기가 힘든 경우가 많았다.
아무리 외래가 지연되고 있어도
환자 문제를 논의하면서 서두르는 인상을 주면 안되기 때문에 왠만하면 환자의 말을 끊으려고 하지 않는다.
나보다 뒷심이 무른 환자는 그냥 내 말을 듣지만
다급해진 대부분의 환자는 나보다 말을 더 많이 한다.
내가 한마디 하면 질문이 쏟아진다.
첫 환자부터 그런 환자로 시작되었다. 첫 환자에서 면담을 하고 나니 15분이 지났다. 

오늘 일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외래 초진이 열명이 넘었다. 외과의 공습이다. 수술하고 항암치료가 필요한지 여부에 대해 처음으로 내과의사를 만나는 환자들. 확실하게 항암치료를 해야하는 환자, 꼭 할 필요가 없는 것이 확실한 환자는 그나마 진료가 명확한데, 애매한 환자들은 역시 여러가지 주변 정황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들에게 설명하면서 괜히 설명하는건가, 더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다, 그냥 내가 결정할 걸...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의학, 의술이란,
환자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명확한 indication에 입각해 결정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훨씬 많다. 그걸 환자들이 이해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오전 외래가 끝나는 대로 병동의 한 환자 보호자 면담을 하려고 했는데
외래가 끝나고 가보니
보호자는 다른 일로 바빠서 날 더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가 버리셨다.
의사가 바쁜거 이해하지만 몇시간이나 기다리게 하는건 너무한거 아니냐는 원망섞인 말씀을 하셨다고 해서 전화로 한참을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

보호자들이 퇴근하는 저녁시간
세명의 환자 남편을 만나기로 했다.
6시 이후에 면담할거라는 나의 말에 나름대로 칼처럼 퇴근 시간을 조정해서 병동에서 나를 기다리신 모양인데, 정작 내가 7시 넘어서 나타나니 그들도 섭섭하다.

다음 주가 학회라서 가능하면 입원환자를 줄이고
외래 시간도 조정하고 있다.

다음 주 학회는 미국 유방암 학회인데, 전 세계에서 과를 막론하고 유방암과 관련된 연구, 진료를 하는 모든 의사, 학자들이 다 모인다. 유방암 단일 질환의 학회인데 전 세계에서 만명이 넘게 모이는 세계 최대의, 최강의 유방암 학회이다. 다른 학회는 몰라도, 이 학회는 가능한 참석하는게 팔요해서 진작부터 신청해 놓은 상태이다.
그런데 막상 가려니 학회 앞뒤로 일이 많다.
환자들 치료 스케줄에도 약간의 변동이 생긴다. 일일히 말씀드리고 조정하고 있지만, 환자들도 별로 기분이 좋을것 같지는 않다. 내가 없는 기간에 강사 대진이 있어서 꼭 시간을 엄수해야 하는 환자들은 대진을 보기로 했다. 몇일 연장이 크게 지장이 없는 환자들은 몇일씩 뒤로 외래를 미루었다. 

입원 환자 중에는 퇴원할 수 없는 컨디션이라 다른 교수님께 의뢰를 해야 하는 환자가 대여섯명 있다. 예상되는 코스를 설정해서, 어떻게 검사, 치료를 진행할 것인지 미리 흐름도를 예상하고, 가능한 상황을 환자와 보호자에게 설명하는게 좋을 것 같았다.

좋아지는 환자에게는 특별히 설명을 많이 하지 않아도 환자가 알아서 좋아지고 있기 때문에 큰문제가 없지만, 면담을 꼭 해야 하는 환자들은 사실 상황이 안 좋기 때문이다. 환자와 가족이 충분히 나의 설명을 이해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걸 위해 한 환자당 나는 30분 정도의 시간을 쓸 수 밖에 없었다. 다 살고 죽는 문제니까.
의사 앞에서 환자는 아직도 허약한 존재.
나를 기다리느라 지치고 짜증도 났을텐데, 내가 의사니까 그냥 참는것 같다.
나의 충분한 설명에 오해를 풀고 나를 이해해 주시는 것 같다.
성의를 다해 상황을 설명하고 나의 입장을 설명하면 95% 이상의 환자들은 나를 이해해주고 얼었던 마음을 풀어주시니 감사하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이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결심한다.
내년에는 학회 가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