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전이성유방암

Stock- dale’s Paradox

슬기엄마 2011. 9. 9. 22:09

환자는 항상 좋아질 수 있다고 믿고 치료한다.
의사는 환자의 희망을 꺾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환자를 격려하며 치료를 시작한다.
환자는 통계는 통계고, 나는 다를 것이라고 믿고 치료한다.
의사는 예외가 있을 수도 있지만 확률적 통계는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치료한다.

스톡 데일의 패러독스라는 말이 있다.
베트남전쟁 당시 8년간이나 포로수용소에 갇혔던 미 해군 3성 장군인 스톡데일의 경험담에서 유래된 말이다. 같이 수용되었던 동료들은 모두 죽었는데 그만이 살아남았다.
동료들은 미국이라는 국가의 힘을 믿고,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나갈 수 있을거야, 그런데 못 나가면 다음 부활절이 되면 나갈 수 있을거야, 긍정적인 마음을 잃지 않고 다음 기회를 기다리며 수용소 생활을 견뎠다. 그러나 좌절의 경험이 반복되면서 그들의 의지는 꺾여갔다. 수용소 생활을 견디지 못하였다.
스톡 데일만이 살아남았다. 그는 희망을 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막연한 희망을 품고 미래를 계획하는 낙관주의자는 아니었다. 최악을 가정하고 막연한 낙관론에 기대기 보다는 현실을 직시한 사람이었다.

통계는 통계다. 통계란 확률적인 분포를 벗어나는 경우가 있기 마련이다.
의외로 일찍 죽음을 맞이하기도,
죽을 것 같았는데 상한치를 넘어서 장기생존자가 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그 누구도 그 예외가 될 수 있다.
난 그래서 환자의 희망을 인정하고, 그 희망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긍정적인 면을 극대화하고 싶다.

뱃속의 병이 심하지는않은 자궁경부암 환자.
처음 1기로 수술했지만, 수술 후 병변이 남아있다.
항암치료를 하면 조금 좋아지는 것 같다가 다시 병변이 자라난다. 아주 작지만 새로운 병면이 생겨난다.
지금도 뱃속의 병변은 특별한 증상이 없을 정도로 작지만,
항암치료 반응평가의 기준으로 보면 점점 나빠지고 있다. 항암제 반응이 없다. 자꾸 새로운 병변이 생겨난다.
나보다 어린 그녀.
오늘 외래에서 처음 만났는데 별 질문이 없다.
입원해서 항암치료를 하기로 했다. 내일모레면 추석이고, 지방에 집이 있다. 그 집에는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을텐데 오늘 입원을 하기로 했다. 결국 그렁그렁한 눈물이 뚝.
나는 입원한 그녀와 어떻게 얘기를 시작해야할까...

2년전 유방암 수술을 했는데 1년 반만에 간과 목 주위 림프절로 재발했다. HER2 양성.
2010년 12월 31일,
HER2 표적치료제롤 포함한 임상연구로 항암치료를 시작했고 환자는 반응이 아주 좋았다.
순식간에 만져졌던 림프절이 소실되었다. 간의 전이된 병변도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발랄한 표정. 생기있는 모습. 그렇게 8개월이 지났다. 통계적으로 제시되는 정확한 수치이다.
엊그제 찍은 CT에서 새로운 간병변, 폐병변이 생겼고, 이미 목 주위의 림프절이 많이 커져서 만져지기 시작한다. 저항성을 획득한 병변이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다. 다른 약제로 바꾸어야 한다.
나는 환자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2차 항암치료를 임상연구로 하자고 설명했다. 표준 치료를 할 수도 있지만, 지금 표준 치료를 해버리면, 그 이후로 병이 나빠졌을 때 효과적인 약제를 기대하기 어렵다.

새롭게 병이 생기고,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병이 진행된거라는 말을 들으셔서
지금 경황이 없으시겠지만
저는 새롭게 치료방법을 제안하려고 합니다.
이러이러한 의미에서 새로운 표적치료제를 포함한 임상연구로 치료를 하는 것이 환자분께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볼까요?

환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 조직검사를 했던 조직에서 슬라이드 15장을 다시 깍고, 뇌 MRI를 찍어서 뇌는 괜찮은지 확인하고, 새로운 임상연구의 대상자가 될 수 있는지를 점검하는 동안,
집이 지방인 환자는 집에 있는 남편과 통화를 하면서 검사일정을 쫓아왔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무너지고 있었다.

선생님 정말 죄송하지만
지금은 다음 치료를 어떻게 할지 생각할 여유가 없어요.
죄송합니다.
집에 가서 생각 좀 해보고 올께요.

환자는 추석 선물이라며 작은 화장품을 선물로 내밀고 집으로 가셨다.
하루 종일 너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었다.

다국적 임상연구라는게 조건이 여간 까다로운게 아니다.
치료약도 제공해주고 CT 검사도 해주고 피검사도 해주고 환자에게 경제적 이득이 많다. 표준치료보다 치료적 효과도 기대해볼 만하다.
그렇지만 그 모든 이득도
병이 나빠졌다는 사실을 듣는 순간 다 부질없어 진다.
나도 그 마음을 너무 이해하기 때문에 집으로 가는 그녀를 잡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환자 마음 속에 꺼져가려고 하는 희망의 불씨를 꺼뜨리면 안된다.
소중히 잘 살려야지.
그렇지만 근거없는 낙관주의로
다 좋아질거에요
저만 믿고 따라오세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환자 나이가 많으면 가족들과 먼저 상의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유방암 환자들은 대부분 젊다. 집에서 너무나 많은 역할을 하고 있는 젊은 엄마들이다. 나는 짧은 외래시간 동안 그녀와 질병 상황에 대해 직면하고 해결책을 찾고 새로운 치료에 도전해야 한다. 희망을 꺾지 않되, 막연하게 낙관적인 견해로 그녀를 현혹할 수 없다.

나는 알고 있다. 이런 나의 코멘트가 얼마나 썰렁한 것인지를...
환자들도 결국 다 알게 된다.
4기 환자에게서 완치란 어렵다.
남은 삶의 시간을 최대한 늘리고
주어진 시간 동안 고통없이 편안하게 살면서 생의 의미를 소중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
결국은 나빠질 것이라는 거
그것을 알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치료를 받는다는 거
그거 너무 어려운 일이다.

내가 나의 수많은 환자들을 보며 그들이 슈퍼맨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들은 이런 고통스러운 시간을 이겨내고
웃는 낯으로 나를 만나고
치료과정의 부작용을 설명하며 열심히 이 하루하루를 투쟁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환자들이 수용소에 갇혀있지만 모두 스톡 데일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