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와 신뢰 관계를 쌓으려면
의사는 태도도 좋아야 하고, 실력도 좋아야 하고, 설명도 잘 해야 하고, 환자의 말도 잘 들어줘야 하고, 환자의 입장과 편의도 고려해서 진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환자가 지금 가장 불편한 문제를 해결해서
불편한 몸 상태가 개선되어야 의사를 신뢰하게 되는 것 같다.
레지던트 2년차 시절.
환자는 이비인후과 의사선생님이었다. 전이성 방광암으로 미국 유수의 대학병원에서 온갖 종류의 항암제, 신약으로 치료를 다 받으셨지만, 결국 병은 나빠지고 한국에 오셔서 우리 병원에 다니며 보존적 치료만 하고 계셨다. 아프면 진통제, 힘들면 영양제...
오랜 병으로 삐쩍 말랐지만 잘 생긴 의사선생님, 인물이 훤칠하다.
입퇴원을 반복하지만 본인의 힘든 증상이 잘 해결되지 않아 심신이 모두 지친 상태였다. 우리 병원에 대한 믿음도 별로 없고 삶에 대한 의지도 별로 없고, 그냥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산다고 하셨다. 전해질 수치가 조금만 맞지 않아도 손발에 경기가 오는 것 같고, 의식도 맑지 않은 때가 있다. 환자는 너무너무 기운이 없었다. 아주 취약한 상태.
나는 코티졸 호르몬 수치 검사를 하여 수치가 떨어져있는 걸 알아냈다. 그리고 스테로이드 호르몬을 저용량 처방했다. 한알에 몇십원 하는 그 싼 약. 환자는 기운이 없어 눈도 잘 못 뜨다가 약을 먹은지 이틀만에 병동을 산책할 수 있을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내가 레지던트인데도, 환자는 나를 깍뜻하게 의사선생님이라 모셔주었다. 맛있는 거 사먹으라며 촌지도 주시고, 부인은 슬기 티셔츠도 사다주셨다. 우리병원에서 섭섭했던 거 다 잊었다고 했다. 살것 같다고 하셨다.
환자는 자신이 가장 힘든 문제를 해결해 줄 때,
비로소 그를 의사로 인정하는 게 아닐까?
응급수술로 생명을 구해주시는 외과선생님, 급성심근경색을 진단하고 관상동맥을 뚫어주는 심장내과 선생님, 위 출혈로 생사를 오가는데 내시경으로 지혈해주시는 소화기내과 선생님, 별로 친절하지 않고 설명 잘 안해줘도 괜찮다. 그는 내 생명을 구해준 의사선생님이기 때문에 환자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종양내과 의사는 이런 드라마틱한 경험을 환자에게 주기 힘들다.
전이성 암이라는게 잠시 좋아지는 듯 하다가도 다시 나빠지는 경우가 더 많고,
병은 좋아지는데 항암제 합병증 때문에 몸 상태도 늘 별로다.
뭔가 사소하면서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때문에 일상이 힘들다.
의사에게 그런 불편함을 얘기했는데, 잘 해결되지 않으면 어찌 믿음이 가겠는가?
할머니 할아버지 환자들, 컨디션이 조금만 안 좋아도 밤에 섬망 증상이 생겨 병동에 큰 소란이 생긴다. 보호자들이 울고 불고 난리다. 부모님이 미친거 아닌가요? 뇌가 이상해진건가요? 섬망은 가족들을 너무 힘들게 하는 이벤트이다. 난 섬망에 드라마틱하게 좋은 약을 알고 있다. 한알 먹고 바로 주무시고, 정신도 맑게 깨어난다.
적극적으로 뭔가 불편하다고 말하는 건 아닌데, 늘 컨디션이 그저그렇다, 기분도 시큰둥, 치료에 의욕도 없고, 그런데 환자는 전반적으로 힘들어 보이고. 갑상선 호르몬 검사를 했더니 갑상선호르몬이 많이 떨어져있다. 싸디싼 씬씨로이드 3일을 먹고 나니 비로소 환자가 날 보고 웃는다.
뭔지는 모르지만 몸이 찌뿌둥하고 자꾸 배도 아프고 열도 나는 것 같고, 온 삭신이 다 쑤신다며 불평이 하늘을 찌른다. 간단한 소변검사로 방광염을 진단, 항생제 3일 먹었더니 몸이 날아갈 것 같다. 오줌 소태가 다 좋아졌다고 하신다. 먹는 항생제 세알로 나는 명의가 된다.
의사는 실력으로 승부해야 한다.
실력이 부족한 나는 환자의 말을 잘 경청하려고 노력한다.
왜냐면 환자의 힘들다는 불평 속에 해답이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암 치료를 하는 과정에서도 환자의 말을 잘 듣다보면 병이 좋아지는지, 나빠지고 있는지 CT를 찍지 않아도 감을 잡을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다 좋아지는 건 아니다. 나빠지는 것을 예측하는 것도 중요하다. 다음 약을 어떻게 선정해야 할지, 어느 시점에 약을 바꾸는 것이 적절할지, 효과적인 약이 더 이상 없을 것 같으면, 항암치료를 중단하고 호스피스 치료에 대해서 논의해야 한다. 앞으로 남아있는 시간에 대해 조금이라도 일찍 준비하는게 환자와 가족에게 필요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병을 좋아지게 하고
혹은 궁극적으로 병이 좋아지지는 않더라도 바로 지금 환자를 힘들게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
그래서 불편한 몸이 좋은 컨디션으로 회복될 수 있게 하는 것
환자의 불평에 최대한 귀를 기울이는 것.
그것이 폼 안나는 종양내과 의사의 책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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