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환자 성격이 고약해도,
항암 치료를 한 후 병이 좋아진 경험이 한번이라도 있으면
의사를 신뢰한다.
그 의사의 말을 들으면 좋아질 수 있다고 믿게 된다.
단 한번의 경험이라도 말이다.
좋아진 CT를 이전 CT와 비교해서 보여주면
아무리 사진을 볼 줄 모르는 환자라 하더라도 금방 이해한다.
아이고, 많이 작아졌네요.
그런데
통계적으로,
가이드라인에 맞춰서 치료를 했지만
계속 약효가 없고
병이 나빠지기만 하면
내가 아무리 자세히, 친절하게, 이유를 설명한다 하더라도
환자는 나를 믿지 않는다.
병원에도 잘 오지 않으려고 하고
검사를 하자고 해도 잘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한다.
치료를 해도 계속 진행하기만 하는 병.
환자는 처음에는 열심히 먹고 운동하고 내가 하자는 대로 잘 따라왔다.
그런데 계속 나빠지니까 점점 내가 하는 말에 꼬투리를 잡는다. 매번 외래는 30분.
결국 나는 의학의 한계 운운하며 그를 설득시키기위해 수많은 논리를 대야 했지만
얘기를 하다보니
마치 내가 항암치료를 하자고 애걸복걸하는 형상이 된것 같기도 했다.
결국 그는 최근 2개월 동안 외래에 오지 않다가
복수가 생기고 눈이 쾡하게 들어갈 정도로 말라서 힘들다며 외래에 다시 왔다.
CT를 찍어 봤더니 엄청 병이 진행했다.
지금에 와서 역으로 되돌이켜보니,
항암치료 효과가 그리 좋지 않다고 생각했을 시절이 사실은 그나마 항암제가 병의 진행을 막아주고 있었던게 아닐까 싶게, 치료를 안한 지난 2달 동안 무섭게 병이 나빠졌다.
아들은 간이식을 하면 안되냐고 자꾸 질문한다.
유방암이 간으로 전이된 경우는 간이식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젊은 아들이니까 왜 그런지에 대해서도 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원리를 설명해주었다.
게다가 지금은 간 상태가 나빠서 항암치료를 결정하기조차 어려운 시점인데,
설명을 듣고도 자꾸 간이식을 할 수는 없는지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아들에게 짜증이 났다.
내 언성이 자꾸 높아지는게 느껴졌는지, 옆에서 아버지가 한말씀하신다.
'이놈이 제 간을 엄마에게 주고 싶다고 해서요'
순간 내가 언성이 높아져 있음을 깨닫는다.
아들이 아픈 엄마를 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엄마의 나쁜 간을 대신해주는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벌건 아들의 눈시울에 어쩔 줄 모르겠다.
의사의 시각으로 당연한 것이
환자의 시각으로는 당연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자꾸 잊어버린다.
나도 의사가 다 되었나 보다...
병동을 내려오는 발길도, 마음도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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