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내가 만든 항암제 다이어리

슬기엄마 2011. 3. 13. 23:11

오늘 퇴원하는 환자 2명에게 항암제 다이어리를 주었다.
사실 작년 후반기 몇개월에 걸쳐 수첩을 디자인하고, 수첩 문구를 작성하느라 술도 많이 마셨다.
(맨정신에는 도저히 아이디어가 안나오므로.)
그래서 내심 꽤 만족스러운 럭셔리 다이어리가 나왔다.
그리고 퇴원을 앞둔 내 환자에게 수첩을 주게 되면 신날 줄 알았다.
'환자와 커뮤니케이션 잘 하려고 이렇게 노력하는 의사도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자랑하고 싶어서 말이다.
그런데...

36세 밖에 안된 젊은 여자. 아이는 둘. 아직 둘째는 초등학교 입학도 안한 꼬맹이.
HER2 양성답게 순식간에 양쪽 유방, 뼈, 간, 림프절 전이가 되었다며 병원에 왔다.
치료를 마치고 나가는 그녀에게

인턴 때
내가 잘 모르는 걸 환자가 물어보면 더듬더듬 설명하는 것 같은
그런 심정으로
이것저것 퇴원설명을 했다.
항암제 부작용이나 힘든 점 있으면 적어오라는 주문을 하는게
이렇게 힘들줄 몰랐다.
나는 과연 그녀와 어떤 관계를 맺는 의사가 될까?

또 한명의 39세 환자.
3기 유방암이라 수술전 항암치료를 적절할 것으로 생각되는 역시 HER2 양성 환자.
전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찍은 PET-CT 에서 오른쪽 팔에 조영증강이 보였다.
연골종양일 가능성이 많지만, 7cm이 넘어 조직검사를 하였다. 조직검사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유방암 치료를 시작했다. 조직검사로 양성과 악성을 구분하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아보였고 양성일 가능성이 90% 이상이기 때문에 일단 공격적인 유방암을 잠재우기로 했다. 팔 윗쪽이라 만약 악성이라면 어깨 관절을 모두 인공관절로 대체하고 수술범위가 아주 클 것이다. 뼈 조직검사 결과가 나오려면 1주일 이상 걸릴 것이고, 모양이 애매해서 특수 염색하고 어쩌고 하면 시간이 지나갈 것이므로
HER2 양성을 고려했을 때 빨리 항암치료를 시작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검사가 반복되고 설명도 어렵고
환자는 매우 불안해했다.
매일 그녀를 안심시키는 것이 나도 힘들었다.
무조건 괜찮다고 할 수도 없고...
우린 그렇게 몇일 같이 부대끼다가 그래도 정이 들었다.
퇴원하는 그녀에게 항암제 다이어리를 주려고 갔더니
어제 저녁에 아드리아마이신을 맞은 그녀. 아침밥도 못 먹고, 하루밤새 환자가 되어 내 말에 별로 대답도 못한다.
난 수첩을 주면서
잘 기록해 오세요.
그렇게 썰령한 한마디만을 남길 수 밖에 없었다.
환자가 힘들어하는데
나만 신나게 커뮤니케이션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이론과 현실은 참 다르고
세상과 환자는 다 내 마음 같지 않다는 걸 늘 잊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