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나도 단풍이 되고, 낙엽이 되고...

슬기엄마 2013. 11. 7. 21:59


마음은 히말라야 트랙킹으로, 산티아고 800km 길로 향하고 있지만 

몸은 늘 병원 뒤 안산에 머물러 있다.

그래도 사시사철 이런 산을 곁에 두고 오를 수 있으니 이게 어디냐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번 가을은 특히 그렇다. 


 

몇일 전 찍은 사진,

같은 산등성이에 모여있는 같은 종류의 나무들인데도

왼쪽 나무는 아직 푸르게 

오른쪽 나무들은 빨갛게 물들어 간다. 머리꼭대기는 아직 초록빛이 남아있지만...

누구는 좀 빨리

누구는 좀 느리게

그래도 지금 자기가 내뿜고 있는 색깔 그 자체로 아름답다. 


  


오늘 오후 1시간쯤 짬이 났다. 

간단하게 빵으로 배를 채우고 안산에 다녀왔다. 

한 나무인데도

아래쪽과 윗쪽의 색이 다르면서도 

형형 색색 조화롭다. 

그런 나무들이 지붕을 이루는 가을길. 

따뜻한 가을 햇살이 비춰질 때 더 온화한 느낌을 준다. 


  


화려하지 않고 은은하게 아름다운 나무와 길.

스마트폰 카메라로는 

직접 나무 앞에 서서, 그 길에 서서 느끼는 그 감동을 담을 수가 없다. 


한 신부님이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요즘 단풍 좋죠.

치장하지 않고 꾸미지 않았어도

때가 되고 가을이 되면 

나무들은 이렇게 곱고 예쁜 색깔로 그 아름다움을 뽐냅니다.


그렇지만 오래지 않아 이들은 낙엽이 되어 다 떨어집니다.

죽기 직전에 나무는 최선을 다해 자신의 아름다움을 선보이는 거에요.

그리고 나면

단풍은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무채색으로 말라 비틀어져 땅바닥을 뒹굴다가 

썩어 거름이 되고

이듬해 그 나무를 키우는 자양분이 됩니다.


우리 사람도 죽기 직전에 자기만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죽어서는 다른 이를 위한 거름이 되는 거죠.

우리도 단풍처럼 곱고 아름답게 늙어 죽읍시다. 

지금 아름다움을 우짖는 단풍은 

우리 인생과 비슷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산에 가서 

나무마다 색이 다르고

같은 나무에서도 다른 색조를 선보이는 단풍을 보니


우리 인생도 

각기 다른 속도로 내달리지만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자기만의 색을 갖게 되고 

그 자체로 다른 존재이지만 남들과 조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자기 존재를 증명하게 되며

결국 죽음 직전에 마지막 아름다움을 선보이다가 죽는 것이고

죽어서 눈에 보이지 않아도

거름이 되어 새로운 생명 탄생에 기여하는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매년 

같은 자리에 

붙박이로 자리잡은 나무가

매년

다른 색의 형형색색 고운 단풍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만

그것은 죽음 직전의 순간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지막 순간에 아름다울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기 위해

잘 죽기 위해 사는 동안 애쓰는 것이 아닐까 싶다. 



최근 1-2주일 사이

매우 빨리 나빠지고 급격히 상태가 악화되는 환자들이 대거 입원하였다.

얼마전까지 

걸어서 외래 다니고 

동반 가족이나 보호자없이 혼자 힘으로 씩씩하게 치료받으시던 분들인데

무슨 도화선이 붙은 것처럼 갑작스럽게 상태가 나빠져서 입원하신 분들이 많다. 


비록 4기 유방암이라고는 했지만 

일상생활 잘 하시고 

어디 아프다는 내색없이 혼자 힘으로 병원 잘 다니며 치료하고 있었다.

다른 암에 비해 환자들의 일생생활 수행능력이 좋다보니

상대적으로 가족들은 환자 병의 무게와 심각성에 다소 무뎌지고 있었다. 

병의 궤적에 대해서 환자만큼 아는 가족이 없다. 

매번 외래 때 설명을 듣고 치료과정을 결정한 것은 오롯이 환자 몫이었다.

그런 환자가 갑자기 나빠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가족들은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매일 서너명 이상의 가족들을 면담하고 있다.

내가 가족면담을 하기로 결정하는 때는 사실 환자상태가 좋지 않을 때이다.

환자 따로 진료하고

가족면담 따로 하는 것은

2중으로 노력하고 2중으로 시간이 소요되고 2중으로 감정이 소모된다.

그래서 선배 의사 모두들 

환자와 가족을 같이 면담하고 

환자에게도 가족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지금의 현실과 예후에 대해 설명하라고 충고한다. 

그렇게 두배로 일하지 말라고. 안 그러면 네가 지친다고.

맞는 말이다.


그러나 많은 환자와 가족들이 그런 과정에서 상처를 받는다.

환자보다 훨씬 유방암에 대해서 잘 모르고, 

그동안 환자 치료과정에 동참하지 않아서 주치의 입장을 모르면서도 

어떻게 환자 앞에서 직접적으로 그런 얘기를 할 수가 있냐고, 

정말 이 의사는 매너가 없고 환자를 위할 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런 서운한 마음을 의사집단 전체로 확장시켜 '의사는 원래 저래'라는 식으로 범주화해버린다. 

그리고 의사에 대한 '신뢰'를 철회해 버린다. 


누구나 자기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눈 앞의 사건과 대상을 '일반화'할 수 있다. 보편적으로 그럴 수 밖에 없다.  

아프고 힘들 때 병원에 갔는데 

힘들고 불편하고 뭔가에 상처받는 일이 생기면

그 일로 의료와 의사집단 전체를 불신하게 된다. 

나도 그래서 20년전에 대학원에서 의료사회학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었다. 

내가 받은 상처를 누군가에게 '투사'하는 것이 필요한데

의사가 좋은 먹이감이다. 


누구나 소송이나 재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변호사를 접촉해 본 경험을 가진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그러나 누구나 살면서 아프고 병들어 병원을 찾는다. 누구나 의사를 직접 접촉할 수 있고 의사와 얘기해볼 수 있다. 같은 전문직이라 해도 한국의 의사는 그만큼 접근이 용이한 대상이며 쉽게 약점이 노출될 수 있는 집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감정적인 결정이라 해도

환자와 가족은 '자기 경험'과 '상처'를 바탕으로 

병원과 의사를 평가한다. 


한국 의사집단은 지난 30년간 이상 전문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환자들에게 '상처'를 주었고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잃었으며 '평판'이 나빠졌다.

전문가적, 직업적 자기 규제능력을 입증하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문제 해결과정에서는 정부의 규제 대상이 되어 왔고 전문가 내부적인 질서와 규범을 위협받았다. 

어떤 이슈를 제기하고, 아무리 절규해도 

국민으로부터 이해받고 지원받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심평원이 의료의 질을 저해하는 규제방안을 강화하고 의사의 의료를 간섭해도

국민들은 의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지금 한국의사의 위기는 지금 한 시점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인 업보에 의한 측면이 많다. 

매듭을 지은 자가 풀지 않았고 

후대에 남은 자들이 너무나 많이 엉켜버린 실타래를 풀어야 할 운명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 수많은 문제들을 한올 한올 푸는 것에 지쳐서 실타래를 몽땅 불에 태워버릴 지경이 되었다. 



나는 나를 위한 시간 배분을 한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상처주고 싶지 않아서,

나에 대한 신뢰를 잃고 싶지 않아서,

밤에도 면담하고,

주말에도 면담하고,

한명 한명이, 한가족 한가족이 

지금 우리 가족에게 주어진 엄청난 위기와 나쁜 상황을 잘 받아들이고 이해하시도록

애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이것밖에 없으므로. 

설령 

내가 지쳐서 더이상 못하겠다 나자빠지더라도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있을 때까지는 

그냥 하려고 한다.


내가 의사로 얻을 수 있는 평판은

죽는 순간 그 직전에 고운 단풍으로 빛을 내다가 낙엽으로 떨어진 다음일 것이다. 

나 혼자만으로 고운 색을 내기는 어렵겠지만

하는데까지 하자.

오래지 않아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말 인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