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오늘 유방암 생존자/경험자를 대상으로 한 강의

슬기엄마 2013. 10. 31. 16:26


오늘은

우리 병원 유방암 클리닉에서

유방암 진단 후 급성기 치료를 마친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건강강좌를 개최한 날이다. 


급성기 치료를 마치고 추적관찰 중인 그들을 어떻게 지칭할 것인가? 

'환자'라는 표현보다는

외국에서는 'Cancer Survivor', 우리말로 하면 '암 생존자'라고 번역되는데, 

생존자라는 표현보다는 '암 경험자'가 더 낫지 않냐는 의견도 있다. 


이들은 몸도 마음도 힘들었던 유방암 치료를 일단 끝낸 분들이다. 

다른 암에 비해 항암치료를 하는 환자들도 많고 

항암치료 기간도 길며, 

수술도 하고 

방사선 치료도 하고, 

1년간 표적치료제도 쓰고, 

5년간 호르몬제도 쓰는, 치료가 복잡한 병이다. 

   

나는 그들에게 유방암 치료가 끝난 후 발생할 수 있는 장기 합병증 가운데 신체적 측면에 맞추어 강의를 하게 되어 있다. 



의사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하는 발표는 

영어로 슬라이드를 만드는 경우가 많고 인용을 할 때는 반드시 참고문헌을 밝혀야 한다. 각주 설명 다는 것이 일이다. 

혹은 자기가 연구한 성과물이나 실험한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라면 연구 가설에 맞게 결과를 조합하여 나만의 스토리를 만들고 -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간데 - 발표를 준비하게 된다.

발표를 듣는 청중과 발표자 간에 기본적인 지식에 대한 공감대가 있으므로 

기본적인 전제는 생략하고 다이렉트하게 본론으로 들어가는 공격적인 화법을 구사할 수도 있다.

그 나름으로 어렵다.  


한편 

환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발표는

짧은 시간 안에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게 중요하다. 

그림이나 사진, 그래프를 보기 좋게 넣고

가능하면 슬라이드에 글을 줄이고

쉬운 말로 설명하여 

청중들의 이해를 돕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물론 환자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다 하더라도 

배경적 지식을 무시하거나 참고문헌을 밝히는 것에 소홀하면 안되겠지만 

그 자체에 치중하기 보다는 

환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핵심 메시지가 잘 이해되는 방식으로 슬라이드를 만드는게 중요하다.

자꾸 발표를 하다보면, 슬라이드의 포장과 편집에 집착하게 된다. 슬라이드 쇼를 구성하거나 슬라이드 바탕화면과 디자인, 글씨 색깔, 선 굵기 그런 형식적인 요건들에 점점 집착하게 된다. 그런 외형적인 포장보다는 핵심 메시지를 간결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너무 자세히, 빡빡하게 설명하는 것도 별로고

너무 두리뭉실, 교육적 효과를 상쇄하는 그런 발표도 별로다.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무엇을 얻어갈 수 있을 것인지 환자 눈높이에 맞추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알고 보면 환자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강의를 잘 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평소에 진료실에서 환자들이 많이 질문하는 내용들을 중심으로 잘 설명하는 시간이 되는 것이 좋을 것같다. 


의사는 환자들의 질문을 받으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얘기를 해주고 싶어 하는지 

그런 심정을 잘 담아서 말이다. 


어떤 날은 진료실에 들어오는 사람마다 

개똥쑥이 면역성을 증진시키는데 먹으면 어떻겠냐는 질문을 하신다. 

어떤 날은 아사이베리로 질문이 바뀐다. 

아마 전날 TV에 나왔나 보다. 


똑같은 답변을 반복해서 하다 보면 은근히 짜증이 난다.

그러므로 이렇게 환자와 일반인 대상으로 한 대중 강의는 교육적 차원에서 매우 소중한 기회이다.

정기적으로 주제를 잡아서 일종의 시리즈처럼 제공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단 의사의 강의는 지루하지 않게. 

꼭 의사가 아니더라도 관련 분야의 종사자들이 내용의 연속선상에서 환자 교육용 강의가 제공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런 교육과 강의는 의학적으로 적절한 범위 내에서 검증되고 관리되어야 한다. 사실 검증되지 않은 교육과 강의들은 너무 많이 널려 있기 때문이다. 



오늘 강의를 듣기 위해 온 분들은 

지식을 얻기 위해 혹은 학문적인 목적으로 공부를 하기 위해 강의를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건강과 미래, 내 존재의 안전성을 의식하며 

애가 타는 마음으로 듣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될 것 같다.

그러므로 예후, 위험요인, 합병증 이런 주제들을 언급할 때는 단어 한개를 선택할 때에도 신중해야 할 것이다. 



지난 달 

유방암 치료 후 3-4년이 지난 암생존자/경험자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번 교육을 받고 나서 유방암 네비게이터 - 유방암 치료 중인 환자들을 돕고 지원하는 지역 사회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자원 봉사자 - 로 활동할 예정인 분들이었다. 

유방암 환자들과 상담하고 그들을 지원하려면

유방암에 관한 의학적인 내용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잘 알고 있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마련된 교육의 장이었다. 나는 그들을 대상으로 유방암 일반에 대해 교육을 하게 되었다.


나는 유방암의 특징 - 다른 암에 비해 내부적인 세부 아형이 나뉘어져 있고 그 세부아형별로 재발이나 질병 진행의 특징이 다양하다는 것, 5년이 지나도 재발할 수 있다는 것, 공격적인 타입의 삼중음성유방암은 2년을 기점으로 재발 여부에 대해 주의를 해야 한다는 것, HER2 양성 환자들의 재발 양상은 어떻다는 것 등등 - 을 설명하였다.

내가 언급한 사실들은 

이미 잘 정립되어 있는 주제이고 

의사가 환자를 진료하는 과정에서 늘 염두에 두는 내용들이었다. 

내용에 특별한 사항은 없다.

나는 소위 과학적 지식(scientific knowledge) 을 말한 것이고, 임상적으로 중요한 유방암의 특징들에 대해 잘 설명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강의를 듣는 청중들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삼중음성유방암으로 치료를 마친지 이제 막 2년이 지난 사람은

내 강의를 들으며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하는 것 같다.

다들 자기의 조건을 염두에 두고 내 말을 듣고 있는 것이다.

암을 진단받고 치료받았다는 것, 

지금은 괜찮지만 여전히 재발의 위협이나 치료의 장기 후유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

그것은 왠만한 노력과 의지로는 극복할 수 없는 조건인 것이다. 


나는 그제서야 아차 싶었다. 


과학적이고 의학적인 지식을

환자와 일반인들의 눈높이에 맞게 

잘 설명하기 위해서는

고민도 많이 필요하고

의사로서의 경험과 연륜도 필요한 것 같다. 

진료실에서 한 명의 환자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명분하에 

디테일에 얽매여 사느라 큰 그림 그리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  



자유로운 인터넷 환경에서 

너무 많은 정보에 노출되고 있지만

믿을만한 정보를 얻기 힘든 환자와 가족, 암생존자/경험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강의를 해 보도록 해야겠다.


방금 완성한 슬라이드 파일을 가지고 

강의장소로 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