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이쁜 놈

슬기엄마 2013. 6. 15. 00:44


1년차 가을,

우리 파트를 돌았다.

유방암 잘 몰라도 유방암 환자에게 잘 했다.

그는 일하는 속도가 좀 느린 편이지만 늦은 시간까지 성실히 일해서 속도를 만회하였다. 

그래서 오프도 늦게 나갔다.

빠릿빠릿하고 센스있는 녀석들은 어떻게든 저녁 7시까지 일을 마치고 오프를 나간다.

데이트도 하고 영화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에너지를 충전해서 돌아온다.

그는 그렇게 영리하고 잽싸게 일하지 못했다.

그저 우직함으로 자신에게 부족한 '속도'를 만회하였다. 


또래에 비해 올드 제너레이션인 우리 둘은 나름으로 힘을 합쳐 열심히 환자를 보았다.


그날도 여전히 그는 오프를 늦게 나갔고 당직이 내 환자 콜을 받는 날이었다.

패혈성 쇼크(Septic shock) 환자, 피검사에서 곰팡이가 자라고 있었다. 아주 위험한 상태.

밤 12시가 가까운 시간, 갑자기 맥박이 1분에 200회 가까이 뛰니 혈압이 떨어졌나 보다. 위급한 상황이다. 

당직은 오프를 나간 레지던트에게 전화를 한 모양이다. 원래 환자를 보던 레지던트가 환자의 치료과정과 최근 상태를 잘 알고 있으니 급할 때는 자기가 직접 파악을 하는 것보다 전화를 하는게 낫다. 전화를 받은 그는 당황했는지 엉겁결에 병원에 있는 나에게 전화를 한다.


선생님, 그 환자 맥박이 200회 가까이 뛰고 있대요. 혈압도 떨어지구요. 환자 의식도 않좋은가봐요.


그래요? 내가 아직 병원에 있는데 한번 가 볼까요?


그제서야 그도 아차 싶었나보다. 나에게 전화를 했다는 것은 어쨋든 환자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뜻이고 자기는 병원에 없으니 어쩔 수 없으니 당직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담당 주치의인 내가 그 상황을 아는 마당에 않좋은 환자를 그냥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사실 환자가 돌아가실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환자와 가족에게 그 예후에 대해 심각하게 설명하지 않은 상태라, 자칫 당직 선에서 심폐소생술을 해 버리면 안되는 그런 복잡한 상황이었다.)

 

결국 레지던트가 전화하니 내가 가서 환자를 보는 형국이 되었다.


그래도 우리 사이엔 그 정도 실례가 용납이 되었다. 

나는 그가 평소에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일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그에게 

내가 과제를 주었다. 

주제는 최근 10년간 우리 병원에서 치료받은 말기 암환자 가운데 죽기 6개월,2개월, 1개월 전 항암치료를 받은 환자의 비율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병원의 의무기록에서 처방코드를 넣어 데이터를 추출하고 그 데이터를 분석해서 변화 양상을 분석해 보는 것이었다. 일일히 환자 한명 한명을 다 보는게 아니라 그렇게 추출된 데이터만 가지고 논의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복잡한 통계나 자료 정리는 필요없었다. 추출할 수 있는 만큼만 대략적으로 보기로 했다. 

그러나 사실 좋은 연구가 되려면 훨씬 많은 자료를 점검해야 했다.

예를 들면 말기 암환자에게 시행하는 '공격적인 치료'의 지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찾은 변수인 임종 직전까지 항암치료를 하는 여부 외에도

응급실 방문횟수, 중환자실 입실여부, 호스피스 시행여부 등등의 요인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수천명의 환자 데이터를 다 점검할 수 없었다. 명령어를 넣어 추출할 수 있는 만큼만 해보기로 했다. 그도 한번 해 보고 싶다고 했다. 


처음 시작할 때

의욕은 있었지만

- 시작할 때는 의욕 충만이다 - 

늘 시간이 없는 레지던트 1년차 2년차 시절.

그는

조금 하다 말다 하다 말다를 반복했다.

바쁘고 힘든 파트에 가면 논문은 정지, 아무 소식이 없다.

좀 여유가 생기면 다시 시작해서 찔금 손을 대 본다. 

그러나 한참동안 손 놓고 있던 데이터를 다시 들어다 보면 사실 첨이나 마찬가지다. 오히려 첨보다 더 정신이 어수선하다. 그렇게 2년이 지났다.


그리고 오늘 암학회에서 그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것도 포스터 발표가 아니라 구연발표로 채택되었다. 

자료의 한계도 명확하고, 

보고자 했던 내용도 간단한 것이라

별로 복잡할 게 없는 내용이지만 

이렇게 자료를 준비하고 분석하고 결론을 내려보고 파워포인트를 만들어보고 발표를 하는

그런 과정을 처음 밟아보는 그로서는 

뭐든지 다 낯설고 많은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몇번의 사전 미팅을 하고 발표 리허설도 해 보았다. 

발표하는 걸 보니 어쨰 불안하다. 

그는 말도 참으로 천천히 했다. 

7분 발표, 3분 토론인데...

발표를 하다가 생각이 안 나거나 말이 막히면 멈추고 나를 보며 

'선생님, 이럴 땐 어떻게 하죠?' 그렇게 씩 웃었다. 


그랬던 그가 오늘 아주 유려하게 발표를 잘 했다.

병원에서 땀에 젖은 후줄근한 가운을 입었을 때와는 달리 오늘은 멋지게 양복을 차려입고 왔다.

차분하게 또박또박 엑설런트하게 발표를 잘 했다. (알고보니 대본을 다 써왔다 ㅎㅎ)

학회에서 주는 어떤 상 후보로 선정되어서 내심 기대를 했었는데, 상을 타지는 못했다.

괜히 기대했다가 실망했을까봐 내 마음이 미안했다. 

우리는 비싼 쇠고기로 저녁을 먹었다.


서운해요?


아니요, 고기 먹으니까 다 괜찮아 졌어요.


서운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그는 늘 맛있게 잘 먹고 행복해 한다. 


종양내과가 아니라 소화기내과를 하려고 생각 중인 그에게

어줍잖은 충고를 몇마디 한다.


내가 보기엔 소화기 내과 *** 선생님이 좋은거 같아요. 

그 선생님이랑 같이 논문도 써 보고 일해보는 기회를 갖는게 어떨까? 

그 선생님 정도면 앞으로 선생님한테 좋은 멘토가 되어주실거 같아요. 내가 대신 부탁 좀 드려볼까요?

내가 봤을 땐 어떤 파트를 정하든 멘토가 중요해요. 


선생님, 계시잖아요.


씩 웃는다.


그 사이 사회성과 아부가 늘었다.  그래도 이쁘다.


그러나 나는 그 틈을 놓지지 않고 잔소리를 한다.


알았어요. 그럼 오늘 들었던 코멘트까지 정리해서

일요일까지 논문 다 쓰고 메일로 보내세요.


먹이사슬, 밀고 당기는 관계. ㅎㅎ 


난 그래도 그렇게 당당하게 성장한 그가 멋지고 이뻤다. 

선생하는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