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사라진 환자

슬기엄마 2013. 6. 7. 12:29


외래 명단에 예약이 되어 있는데

환자가 오지 않는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다.

핸드폰으로. 

집으로.

그날 연락이 안되서 다음날 다시 해 보지만 역시 연락두절.

외래 간호사가 줄기차게 전화를 해 보지만 연락이 안된다. 

그렇게 몇일을 연락해도 연락이 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다 환자 놓치는거 아닐까?


다른 병원에서 온 환자라 

그 병원에도 전화를 하였다.

그 환자에게 연락을 해볼 방법이 없겠냐고.

그 병원에서도 백방으로 수소문해서 알아보았다. 


환자가 집을 나갔다고 한다.

가족도 환자의 현재 상황을 잘 모른다.

항암치료 2번 했는데 그 기간 내내 힘들어했다고 한다.

환자에게 정신과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말을 하는 가족의 반응도 보통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과 다르다.

어째 대화가 잘 안통하는 느낌이다. 



초진 진료 때

환자와 대화를 하는데

뭔가 내 설명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만 첫 치료를 빨리 시작하는게 중요한 환자라서 일단 항암치료를 시작하였다. 




환자를 처음 보았을 때 

총체적인 진단과 검사, 판단을 하지 않았다는 반성을 한다.

사람 관계라는게 첫인상이라는게 중요하다고 한다. 처음에 관계를 잘 맺어야 한다.

처음에 full examination 을 해야 

중간에 생길 수 있는 문제도 예방하고, 

문제가 발생해도 당황하지 않고, 

환자-의사 관계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의사는 환자가 의사에게 정보를 충분히 주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반면 환자는 의사에게 이런 걸 말할 필요가 있는 건지 아닌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환자랑 이야기를 나누면서 

보통 환자들과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사실 애매한 느낌이었다. 

뭐가 다른건지, 어떤 부분이 이상한건지 나도 잘 모르겠고 

그러니까 그에게 뭔가를 집요하게 캐물을 수도 없었다. 

시간도 없었고 첫 대면에 그런 질문을 스무스하게 던지기도 어려웠다. 

다짜고짜 정신과 진료를 보시라고 권할 수도 없었다.  

나는 좀 신뢰가 생기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얘기하면 된다고 합리화하며 

항암제 처방을 했다.



암환자를 진료할 때 제일 편한 환자가 항암치료하는 환자이다.

컨디션 확인하고 항암제 처방하면 된다. 진료시간도 짧게 걸린다.

항암치료를 안하면 환자랑 할 얘기도 많고 진료시간도 많이 걸린다.

환자나 가족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만 별로 처방할 것은 없다. 


이 환자를 보면서

일단 항암제를 처방한건 

환자와 어려운 문제를 회피하고 쉽게쉽게 갈려고 그랬던건 아닐까?


나를 합리화할 여유를 주지 않고 환자가 사라져 버렸다.

그에게 적용가능한 항암제 약이 몇가지 없고

이번에 쓰기 시작한 약이 제일 좋은건데...

나빠져서 오면 쓸 약도 없는데...

환자랑 충분히 공감하지 못해 

앞으로 치료를 할 수 없게 되는거 아닌가 

마음이 초조하다. 


암환자 진료의 특성 상

한번 진료를 시작하면 평생 주치의가 되는 경우가 많다.

첫 만남에 좀더 신경을 써야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