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웃자고 하는 이야기 - 나의 성산일출봉 survival 이야기

슬기엄마 2012. 4. 24. 01:29

 

 

때는 바야흐로 1990 12 30.

제가 90학번이니까 대학생활 딱 1년하고 친구 2명과 제주도로 겨울 여행을 떠났어요.

저희는 10만원씩 모아서 세명이 서울에서 목포를 경유하여 배를 타고 제주도로 갔지요.

목포에 제 외할머니가 계셔서 하룻밤 신세지고 밥도 얻어먹고 용돈도 타고 돈을 아끼기 위해 배를 타고 제주도로 갔죠.

그때만 해도 뱅기는 잘 사는 사람들이 타는 교통수단. (뱅기 표값이 28천원인가 그렇고 배값이 9천원인가 했던거 같아요)

나는 여행경비를 관리하는 총무.

우리는 돌아갈 때 뱅기한번 타보자고, 그러니까 여행경비 아끼자고 다짐하고 나를 총부로 임명하여 짠순이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제주도에 내리자마자 바나나랑 파인애플이 보이는거에요.

그땐 그런 과일이 좀 귀했잖아요.

촌스러운 우리는 그 과일들을 보고 흥분하여 이거 서울에 있는 가족들에게 선물하면 좋겠다며

크고 무겁기 짝이 없는 파인애플을 두통씩 사서 까만 비닐 봉다리에 넣어가지고

여행 내내 그걸 끌고 다녔어요.

안그래도 돈 아낀다며 왠만하면 걸어다닐 판국인데

그 파인애플까지 끌고 다니려니 어찌나 여행이 짜증나던지.

 

내가 너무 심하게 돈을 아끼고 안 쓰면서

밥도 허술하게 맥이고 간식도 안 사주고 그래서

친구 2인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어요.

급기야 1990 12 31일 이놈아들이 ‘커피나’를 사달라고 나를 달달 볶았어요. 폭동이라도 일어날 기세였어요.

나는 민심을 수습하는게 필요할거 같아 한통 사줬죠.

이놈아들 흥분해서 과자 껍데기를 벗기고 안에 들어있는 비닐 봉다리를 뜯는 순간

너무 과하게 힘이 가해져서 비닐이 쫙 찢어지면서 커피나가 다 땅바닥에 떨어졌지 뭐에요.

정말 피눈물 나게 아까운 커피나. 애들이 어쩔 줄 몰라했어요. 나를 애처롭게 쳐다보며 한통 더 사주면 안되냐는 눈빛을 보냈지만

난 다시 사주지 않았어요.

민심 더욱 악화되고

우리는 대화없이 여기저기 무표정하게 무거운 파인애플을 끌고 돌아다니며 힘겨운 여행을 지속했죠.

 

신혼여행 부부들이 간다는 허니문 하우스.

우린 아낄 땐 아끼더라도 이렇게 경치좋은 곳에서는 커피 한잔씩은 마셔야 한다며

이놈아들이 나를 또 달달 볶았어요. 저도 그때 커피라를 말에 회가 동해서 그들의 과소비 요구에 동의했죠.

우리는 우중충한 오리털 잠바때기를 입고 화사한 신혼부부 가득한 허니문하우스 호텔 커피숖에 들어가

신혼 부부들 사이에서 커피랑 전통차를 마시며 제주도 겨울풍경을 즐겼어요.

모처럼 우리의 우정이 살아나는 순간이었어요. , 제주도 오기 잘했어 그지?

그런데 계산을 하고 나오려는데

우린 분명이 한잔에 25백원인 줄 알았던 커피가

tax, service 요금 10% 씩이 추가로 붙는 바람에 예상외로 많은 돈을 지출하게 되었어요.

호텔에 첨 가봤기 때문에 그런 돈이 추가로 붙는다는 걸 몰랐죠.

총무인 나는 책임을 통감하고 원통해 했으며 이놈아들도 ‘우리가 미쳤다’며 다들 쫄았죠.

저녁 싼거 먹으면 되 그렇게 서로를 위로하며 허니문 하우스를 나왔어요.

그 파인애플은 계속 들고 다니는 중이에요.

 

12 31일 밤. 저녁을 100원짜리 대보름달 빵과 50원짜리 요구르트를 먹었어요.  

그리고 여학생 세명이 한방에서 잘 수 있는 7천원짜리 민박집을 구했어요. 당시로도 싼 편이었어요.

그런데 너무 싼 방이다보니 지리적으로 좋지 않았어요.

문간방이라 바람도 많이 들어와서 춥고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는 소리, 화장실 이용하는 소리, 이닦으면서 가래뱉는 소리 그런 사운드가 너무 큰거에요.

내일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성산일출봉에 가야하는데

도저히 집중해서 잠을 잘 수가 없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밖에 나가 쏘주 1, 새우깡 한봉다리를 사왔죠.

우리 우정을 위해 한잔씩 하자.

그러나 이놈아들은 어떻게 쏘주를 새우깡에 먹냐며 쏘주를 거부하고 새우깡만 야금야금 먹는거에요.

그래서 제가 쏘주를 다 마시고 그들에게 새우깡을 양보했죠.

 

대망의 1991 1 1일 새벽.

일출을 봐야 한다며

온 성산 일출봉 근처 민박들 투숙객들이

새벽 4시 반부터 술렁술렁 다들 일출봉 오를 준비를 하느라 어수선해서 잠을 더 이상 잘 수 없었어요.

난 쏘주마신거 다 안깼는데 어쩔 수 없이 일출봉을 향해 출발했어요.

지하철처럼 사람들이 떼를 지어 일출봉에 오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스텦 엉키면 길이 막혔어요.

뒷 사람들한테 지탄받을까봐 보조를 맞춰서 잘 올라야 하는 거에요.

그런데 제가 술 먹고 산에 오르니 또 어지러워지면서 syncope를 하고 말았어요. (이런 현상은 vasovagal syncope의 대표적인 증상이에요)

덩치가 큰 내가 syncope를 하자 제 친구들은 저를 어쩌지도 못하고 쓰러져 있는 저를 옆으로 굴렸어요.

일출봉 올라가 보셨어요? 거기 사실 경사도 심하지 않은 야트막한 계단으로 오르는 곳이잖아요.

제가 쓰러져서 길이 순식간에 막히니까

애들이 당황한 나머지 저를 계단 옆 풀밭으로 굴린 거에요.

전 쓰러진 채 데굴데굴 굴러서 저 아래 풀밭으로 굴러가서 정신을 못 차리고 쓰러져 있었어요.

(그 때 사람들이 수근수근 흉을 봤대요. 뭐 이렇게 낮은데서 쓰러지는거야? 웃기다 제. 등치는 산만해가지고)

하지만 vasovagal syncope은 누워있으면 venous return이 돌아오면서 heart 에 혈액이 공급되면 저절로 깨어나게 되어 있어요.

전 깨어나서 약간의 기억이 상실된 듯, 별 기억이 안났지만 다시 힘이 나서 애들을 닥달해서 다시 일출봉을 올랐어요.

지금이니까 그게 vasovagal syncope인지 알지, 당시에 나도 그렇고 내 친구도 그렇고 그게 뭔지 모른채

나를 굴러떨어뜨려 놓고 내 옆에서 무릎 꿇고 앉아 엉엉 울었나 봐요.

정작 나는 깨어나서 빨리 올라가자고 애들을 독촉했죠.

그렇게 성산일출봉에 올라 큰 소리로 노래도 한곡 불렀죠.

그 정도는 해야 새해 기운이 나에게 올 것 같았어요.

내가 노래하니까 주위 사람들이 날 아주 이상한 애 취급했죠. 아까 쓰러져 있던 애 아니야?

 

전 그렇게 스스로 survival 해서

일출봉에서 살아돌아왔고 뱅기타고 서울 왔어요. 가족들에게 파인애플 선물로 줬더니 그거 동네 가게에도 다 있는거라고 하더군요. ㅜㅜ

그 친구들과는 상당히 오랜 기간 만나지 않았어요.

 

이것이 나의 성산일출봉 survival 이야기.

 

그 아이들은 서울 올라오자 마자 커피나 세통씩 사먹었어요. 남은 회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