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타향에서 시들어가는 젊음

슬기엄마 2012. 4. 20. 13:14

 

2000년 한국에 거주하는 이주 노동자들의 건강실태를 다룬 의료백서를 만든 적이 있다.

(그때는 이주 노동자라는 말보다 외국인 노동자라는 말을 더 많이 썼다.)

나는 당시 본과 1학년 의대 학생이었지만 솔직히 건강/의학적인 내용은 아는게 하나도 없고,

오히려 사회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는 이유로 의료백서 발행 일을 하게 되었다.

2달에 걸쳐 경기도 내 외국인 노동자 상담소 16곳을 방문하였고

상담소 별로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사례를 모았다.

비합법적 신분을 갖고 있는 그들이 의료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함으로 인해 얼마나 치명적 위험에 노출되고 있는지, 결과는 어떤지 그런 사례를 모아 인권적 차원에서 기술하였다.

 

그리고 생활협동조합의 형식을 빌어 의료공제회라는 이름의 조직을 창립하게 되었다.

아직 병이 없는 건강한 이주노동자들이

한달에 5천원씩 공제회비를 내고,

큰 병이 발생하면 공제회에서 비용을 어느 정도 부담해 주는 것으로 하였다.

그리고 비합법적 노동조건에서 일하는 이주 노동자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진료비 감면의 혜택을 주겠다는 전국의 병의원이 이 조합에 참여 의사를 밝혔다.

(당시 공제회 가입을 독려하기 위해 여러 병의원에 방문을 다녔는데, 그때 많은 의사들이 흔쾌히 지원 의사를 밝혀주어 깜짝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쉽게도 아직까지도 국가적 지원은 없고 이주노동자 후원의 의지가 있는 개별 의사나 병원이 민간적 차원에서 진행하고 있는 사업이다. 그렇게 건강협회가 결성되고 활동한 지 10년이 넘었다.

 

나는

그 사이에 건강백서도 내고 운영위원 회의에도 참여하는 등 잠시 활동을 유지했지만

인턴이 된 후 협회의 회의나 모임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시간도 없고 내 앞가림에 정신이 없었다. 사회적 참여 활동은 모두 뒤로 미루었다.

종양내과 전문의가 된 후로도 참여하지 않았다.

대개 나이가 젊은 이주 노동자들의 건강과 삶에 이 문제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한두번 회의에 갔지만 나는 이미 너무 감이 떨어져서 회의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여전히 운영위원이라는 직함은 갖고 있지만 지금은 거의 하는 일이 없다.

 

매주 건강협회에서 의료비 지급의 적절성을 평가해 달라는 메일이 날라오지만, 암 환자만 보는 내가 잘 모르는 영역의 병이 많기 때문에 제대로 검사하고 제대로 치료하고 제대로 돈을 냈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래서 메일도 한번 쓱 읽고 답장도 제대로 안하고 넘겨왔다.

 

그러던 오늘

 

45세 밖에 안된 젊은 남자가

욕창으로 모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받아 200만원 가까운 치료비 지급이 필요하다는 요청

 

40세 밖에 안된 젊은 여자가 원인 불명의 간내 결석, 담도내 결석으로 인해 담관염이 반복되어 입원치료 중이라는 요청

 

40세 밖에 안된 젊은 남자가 뇌출혈로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중환자실 치료를 받고 있어 진료비 지원이 필요하다는 요청

 

이렇게 3가지 사례에 대해 심사요청메일이 날라왔다.

40대 젊은 남자가 왠 뇌출혈? 왠 욕창? 이해가 안되서 협회에 문의하였다.

 

욕창 환자는 예전 한국에 들어와 노동일을 하던 사람인데 당시 뺑소니를 당해 하반신 마비상태가되어 출국하셨다고 한다. 욕창이 자꾸 문제가 되어 2008년에 재입국하여 욕창치료를 받고 출국한 적도 있다고 한다. 2011년 다시 아는 선교사의 도움으로 H-2 (방문취업비자) 비자를 받을 수 있게 되어 조금이라도 일을 해보려고 입국했다가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욕창이 심하게 재발하였다고 한다. 입원해서 욕창 치료를 할 정도로 심한 상태. 지금은 퇴원하여 1달 정도 외래치료를 받고 다시 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한다.

결국 이 젊은 남자의 욕창 원인은 뺑소니였다. 뺑소니 사고를 당하는 이주 노동자들은 소송을 하거나 사고 당사자를 찾는 일을 하지 않는다. 자기 신분이 불법이니까

 

 

40세 밖에 안되는 젊은 남자의 뇌출혈도 흔한 일이 아니다.

그동안은 어땠는지 협회에 문의해보니

2009년 뇌출혈 환자는 총 6, 30 2 (교통사고 후)/ 50 2/ 60 1/ 70 1

2010년 뇌출혈 환자는 총 9, 40 2/ 50 4/ 60 2

2011년 뇌출혈 환자는 총 8, 40 1/ 50 7 (50대 환자는 대부분 50대 초반)

이 발생하였고

의료공제회에서 이들에게 의료비를 지급한 것으로 되어 있다.

뇌출혈 환자의 연령대가 낮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왜 뇌출혈이 발생했는지에 대해서는 해당 환자의 의료기록을 면밀히 검토해 보고 원인의 근거를 명확히 찾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역학적으로 의문의 여지가 있다. 강도높은 노동조건이나 근무시간과의 연관성이 높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10년전 의대 학생의 신분으로 이런 사례를 접할 때는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10년이 지난 지금, 의사가 되어 이런 사례를 접하니 훨씬 어이가 없고 안타깝기도 하다. 어쩔 수 없는 질병의 코스가 아니라 충분히 조절가능하고 예방할 수도 있었던 사례들이다. 암환자만 보는 내가, 그래서 항상 어쩔 수 없는 병의 한계를 안타깝게 지켜보아야 했던 것과는 달리, 조절가능하고 치료가능하고 예방도 가능했던 병 때문에 젊은 꽃이 시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니 어이가 없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