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슬기의 일기 - 1

슬기엄마 2012. 4. 4. 16:00

신문 청년의사에 슬기의 일기 연재가 시작되었다.

인터넷 판에는 아직 실리지 않고 종이신문으로만 나왔다.

매달 한번씩, 이제 11번 남은 슬기의 일기. 어제 1년치 계획을 세웠다.

글쓰기에 대한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 같다며 기대하는 눈치다.

어렸을 때는 뭐든 경험하고 도전하고 해보는게 좋은것 같다.

 

 

다음은 첫번째 기고문.

 

 

엄마의 생일

 

1 27일은 엄마의 생일이었다. 늦게까지 집에 오지 않는 엄마에게 전화를 해 보았다. 원래 늦으면 병원에서 주무시거나 내가 잠든 이후 아주 늦게 들어오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에 전화를 잘 안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생일이니까 전화를 한번 해야할 것 같았다. 힘없는 엄마의 목소리, 오늘 최악의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1년에 한 번뿐인 생일인데!

성격이 무덤덤한 편인 나는 올해부터는 가족의 생일은 챙겨야겠다고 결심한 바가 있어 엄마 생일을 맞이하여 늦게라도 들어오시면 생일파티를 하려고 내 돈으로 케이크도 사 두었는데 그 대접도 못 받는 엄마가 안타깝고 불쌍하게 느껴졌다.

 

엄마는 아무리 밤에 늦게 들어와도 TV를 켜고 CSI NCIS 등의 미드를 보는 편인데, 나도 수년간 엄마 옆에서 그런 수사 드라마를 봐 왔다. 그리고 파일을 구해 예전 드라마들도 찾아서 볼 정도로 엄마보다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의 장래 희망은 법의학자이다. 법의학자가 되어 국과수에서 일하려면 그전에 의사가 되어야 한다. 난 그래서 의대에 가기로 했다. 의대 입학 자체도 어려운데, 그렇게 입학해도 의대를 무사히 졸업하고 레지던트 과정을 마친 뒤 전문의 시험에 합격해야 내가 원하는 법의관으로 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 자리잡은 또 하나의 희망은 밴드를 하는 것이다.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 음악을 듣는 데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 MBC 나는 가수다를 보고 YB를 좋아하게 되었다. 영상을 찾아보고 그 밴드의 노래를 챙겨 듣다 보니 밴드가 직업이 아니더라도 꼭 한번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이름하여 직장인 밴드. 그래서 난 요즘 기타를 배우고 있다.

그런데 문득 생일에 집에도 오지 못하는 엄마를 보며 직장인 밴드는 정말로 출퇴근 시간이 일정하고 비교적 규칙적인 휴일이 있는 직장인들이 하는 밴드이지, 30대가 될 때까지 의대에서 공부하고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정신없이 거쳐야 하는 의사에게는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엄마가 좀 특별한 것 같기는 하지만 전문의가 된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늘 바쁘다. 아직도 집에 잘 들어오지 못하거나 늦게 들어오고 휴가도 제대로 가 본적이 없다. 내가 보기에 페이스북 외에 시간을 들여서 하는 여가 활동도 없는 것 같다. 엄마가 학생 때는 의사가 되면 나을 거야, 인턴이 되어서는 레지던트가 되면 나을거야, 레지던트가 되어서는 4년차만 되어도 나을거야, 4년차 때는 펠로우가 되면 나을거야, 펠로우 때는 교수가 되면 나을거야, 그렇게 매년 스스로를 위로했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별로 나아진 게 없다. 상태가 더 나빠지는 것 같다.

전문의 시험에 막 합격한 엄마에게 나는 간장종지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

엄마는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거 하나도 모르네?”

전문의 시험 공부만 해서 그래

그럼 한 우물만 판 거네? 좁고 깊게

별로 깊지도 않아.”

그래서 엄마의 별명은 얕고 좁고 금방 쏟아질 것 같은 지식을 담은 간장종지가 되었다.

그렇지만 엄마의 페이스북과 블로그의 글, 가끔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 엄마가 맡은 환자가 나아졌다는 소식을 듣게 될 때가 종종 있는데, 간장종지에도 계속 간장을 담다 보니 그릇이 커졌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엄마가 별나긴 하다.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해서 아직까지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아빠만 보더라도 급한 수술이 없으면 저녁에 집에도 규칙적으로 오시고 독서도 많이 하시며 평화롭게 사시는 것 같다. 의사가 되어도, 법의학자가 되어도 밴드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다.

요즘 엄마가 삶의 탈출구가 필요하다며 중고 건반이라도 사겠다고 인터넷을 뒤지고 있다. 엄마와 같이 밴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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