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혼이 빠진 것 같다.
전화를 하고 나서 끊는 순간, 바로 전화 내용을 잊어버린다.
뭐 확인하고 나서 다시 전화하겠다고 해 놓고 확인을 안 하거나, 하고도 전화를 다시 하지 않는다.
메일을 받으면 그때그때 해결해야 한다. 안 그러면 하루이틀 사이에 사서함이 꽉 차서 메일 수신이 되지 않기 때문에 부지런히 메일에 답을 하거나 할 일을 한 다음 메일을 지워야 한다.
그래도 아직 내 메일함에는 해결되지 않은 일들로 가득이다. 3주가 지나가면 저절로 지워지는데, 3주안에 일을 해결하지 못해 지워지는 일들도 있다.
메일이 오면 딩동 소리가 난다. 항상 메일함을 열어놓는다. 할 일을 잊지 않기 위해...
중요한 발표가 있어도 전날 저녁까지 까맣게 잊고 있다가 불연듯, 혹은 확인전화를 받고 생각해내기도 한다.
그러므로 가족끼리 한 약속, 연락 사항들은 깡그리 잊고 산다. 엄마도 처음에는 서운해 하시더니 요즘엔 이해를 하시는 눈치다. 성의가 없어서 그런게 아니라 바빠서 다 잊어버리는 거라는 걸 아시는 것 같다.
왜 이렇게 바쁘고 정신을 내려놓고 사는걸까?
나를 바쁘게 하는 일들 중에 사소한 일, 안 중요한 일이 더 많은 것 같은데...
누군가 그랬다. 바쁘게 사는 것에 대해 반성하라고. 왜 바쁜지 생각해보라고...
아 찔린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외래환자가 늘어나서 그런것 같다.
외래는 10분에 3명 진료하게 되어 있다. 때론 4명이 되기도 한다.
3명이든 4명이든 한 환자당 할당할 수있는 시간이 3분 남짓인데
창원에서, 제주에서, 광주에서, 목포에서, 삼척에서
새벽같이 일어나 빈 속에 버스타고 비싼 KTX타고 심지어 비행기타고 서울까지 허위허위 올라와
피검사하고 진료보는 환자들에게
그 시간 내내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애를 태우다가
정작 의사를 만나는 3-4분은
너무 야속한 시간이다.
'착한' 환자가 되고 싶어하는 일부 환자들은
내심 섭섭하고 속상하면서도
"별 일 없으시죠?" 라는 나의 질문에
그냥 "네. 오늘 주사 맞아도 되요?" 한마디 묻고 진료실을 나간다.
그렇게 '미련하고도 착한' 환자들도 있지만
많은 환자들은 봇물 터지듯, 이야기의 흐름이 연결도 잘 안되는 질문을 쏟아내시면서
날 만나면 묻고 싶었던 질문들을 던지신다. 당연하다.
난 최소한 10분은 환자들과 얘길 하고 싶은데...
치료를 받는 동안 궁금하고 걱정되고 물어보고 싶은 건
그 누구도 속시원히 대답해 줄 수 없는 것들이다.
주치의인 내가 최종적으로 핵심적인 대답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나는 그 정도 진료는 해 주고 싶다.
그들하고 한마디라도 더 할려면
미리 외래를 다 예습하고 - 심지어 괜찮을거 같은 환자는 오더도 내 놓는다 -
진료기록도 다 써놓고 - 그래서 진료시간에는 별로 기록을 하지 않는다 -
사진을 미리 찍은 환자라면 사진도 미리 다 봐두고
병이 좋아졌는지 나빠졌는지에 따라 약제를 변경하는게 필요하면 약제, 용법도 다 정해놓고
그렇게 최소 3-4시간을 예습한다.
그리고 다음날 외래를 본다.
그리고 그 날 밤에는 그 다음 날 외래를 3-4시간 예습한다.
그렇게 1주일에 4일을 보낸다. 월화수금(토) 외래니까 그 전날은 예습의 밤을 불태워야 한다.
아마도 지금은 연수예정인 손주혁 선생님 환자가 나에게 이양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새로 파악해야 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럴거라고 믿고 싶다.
특히 오늘처럼 오전 오후 외래를 다 보는 날이면
극도의 긴장상태에서 종일 외래를 보고, - 외래는 정말 극도의 긴장상태이다 -
학회가서 무슨 발표를 하고 나니
그나마 남아있는 혼도 모두 빠져나간다. 영혼이 모두 빠져나간 유령이 된 기분...
내가 환자를 위해 고민하고 그들에게 내 시간을 쓰는 만큼
환자는 나의 기를 받아 좋아지는 거라고 믿고 싶다.
예수님도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었고 우린 그걸 먹고 마시며 예수님의 자식이 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난 종교성이 강하지 않는데 이 이야기는 참 와 닿는다.
사람 사는 게 그렇게 기가 전해지는 것 아니겠는가 애쓰는 만큼, 주는만큼... )
사랑도 내가 많이 주어야 돈독해 지는 게 정이고 관계인 것 같다.
지금은 혹독한 외래 수업을 통해
나는 내 시간과 기를 환자에게 잘 전달하는 법을 배우는 트레이닝 기간인가 보다.
환자들이 생각하듯이
의사의 삶은 환자를 중심으로 살기 어렵다. 대학병원에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더 많은 잡일들이 신경을 건드린다.
그래도 지금은 내 고민과 삶의 중심은 환자로 향하도록 훈련받아야 하는 기간이다.
외래가 끝나고 나서 긴장이 풀리면
지금처럼 썩은 동태눈이 되어 맥없이 자리에 앉아있는다. 집에 갈 힘도 없다.
주중에는 환자모드로, 주말에는 연구모드로 나를 전환해야 한다. 오마이갓, 정말 힘에 부친다.
능력이 되는 사람이라면 좋은 기회일텐데
능력이 안되고 늙은 나에게는 혹독한 시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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