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유방암 환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나만 고생이 아니야

슬기엄마 2011. 6. 13. 11:31

72세 할머니.
유방암 3기로 수술전 항암치료를 받으신 후 수술을 받으셨다.
그리고 요즘은 수술 후 허셉틴을 맞고 계신다. 이제 4-5개월 남으신 것 같다.
다행히 다 보험이 되는 시절의 치료라 치료비 자체가 아주 큰 부담은 아니다.
그래도 할머니는
본인의 경제적 능력은 없는 상태에서
자식들이 비용을 다 대주는 최근 1-2년의 치료과정이 아주 부담스러우신 모양이다.
무슨 약이든 안 쓰겠다고 하고
검사도 안 하시겠다며
그냥 대충 견디시겠다고 한다.

외래를 정기적으로 보다보니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할머니가 내 질문에 너무 대충 대답하는 것 같아서
꼬치꼬치 캐묻고 성가시게 굴어봤다.
그리고 보니, 주로 지금 외래 방 구조상 할머니의 왼쪽 방향이 나를 향하게 되어 있는데
왼쪽귀의 청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 소위 가는귀를 먹은 것 같았다.
안가시겠다는 이비인후과 진료를 억지로 밀어보냈다.
그리고 진료결과를 보니 고막이 터져있었고 염증도 좀 있는 상태라고 되어 있으며 일반진료에서 특진으로 담당의를 바꾸고, 수술할 것을 권유한 상태이다.

다음번에 오신 할머니께 수술날짜 잡혔냐고 여쭤보니,
이비인후과에서 날짜를 잡아줬지만
-대학병원 이비인후과에서 수술날짜를 이렇게 빨리 잡아주다니! 수술을 꼭 필요했으니 날짜도 빨리 잡아준게 아닐까?-
할머니가 싫다고 하셨단다.
그리고 그 다음 진료는 가지도 않으셨다고 한다.
자꾸 이것저것 검사하자고 하니
검사비, 수술비도 걱정되고 해서 그러셨단다.
그냥 귀 어두운 채로 살아도 괜찮다고 하신다.
이렇게 돈 쓰면서 치료받는 것도 미안한데
늙은이가 뭐 얼마나 좋아지고 오래 살고 싶어서 자꾸 검사하고 수술하냐고. 자식들 보기 민망하다고.
이래 저래 설명해도 별 소용이 없길래
병 키워서 크게 만들어서 치료하면 치료되지도 않고
돈도 더 많이 드니까 자식들한테 더 미안하게 될거라고 협박했더니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본다. 돈이 더 많이 든다고?

다음번에 오신 할머니는 수술날짜를 잡으셨다고 하셨다.
내가 아프니, 나만 고생이 아니라 온 가족이 고생이라고.
늙어서 병원 다니는 것도 혼자 못하고
꼭 자식 중에 한명이 직장에서 휴가를 내고 나와야 하니 미안해서 병원오기 싫다고 하신다.
그래도 자식들이 효자구나 싶다.
더 아프면 더 자식들 고생시키는 것이니 나을 수 있을 때, 방법이 있을 때, 열심히 치료해서 다시 건강해지셔야 더 부담주는게 아니라고 말씀드린다.
할머니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식들 부담, 돈 문제이다.

우리나라 의료시스템은 비교적 국가에서 많은 의료재원을 제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까지 공적부조의 개념이 약하다.
가족이 문제해결의 단위가 되어야 한다. 돈도 간병도...아직은 자식이 보험이다.
설령 공적부조가 튼튼하여도
가족중에 누군가가 아프면 아픈 한 사람만 고생하는게 아닌건 당연하겠지만 말이다.

점점 고령의 환자들이 많아진다.
이들의 존재가 미래의 짐이 되지 않기 위한 준비가 아직 없다.
이건 진료실의 의사와 환자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정책/제도의 문제일 것이다.
내 눈 앞의 환자에게 잘 하기위해서는
내 멀리 있어 보이는 사회와 국가의 움직임에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