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우리나라 좋은나라

슬기엄마 2011. 4. 7. 09:05

'슬픔이 희망에게' 김혜정
2000년 캐나다로 이민간 작가 김혜정이
이민 10개월 만에 큰아들 설휘가 뇌종양을 진단받고 나서 치료받는 과정을 쓴 일종의 투병기이다.
책 제목도 진부하고
사실 투병기의 담론구조는 어느 정도 정형화되어 있기 때문에
선뜻 읽고 싶은 생각이 드는 책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책은 투병기라고 보기엔
글쓴이가 다큐멘타리 작가라서 그랬을까?
엄마와 가족의 심정, 투병의 어려움, 극복을 위한 노력 등이 잘 묘사되어 있는 것 이외에도
우리나라와 캐나다 의료시스템의 차이, 장단점이 잘 분석되어 있는 보고서였다.
그녀는 한국의 의료시스템에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환자를 위해 어떤 좋은 점이 있는지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유방암 수술 후 항암치료를 시작한지 9일만에 열이 나서 입원한 환자.
이 분은 한국 사람이지만 현재 캐나다에 살고 계시고, 한국 건강보험 적용이 안되는 상태이다.
보험 적용이 안된채 유방암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를 시작하였다.
처음 만난 외래에서
캐나다는 의료비가 모두 무료일텐데 왜 굳이 한국에 오셨냐고, 캐나다 의료시스템도 좋지 않냐고 물어보았다. 환자는 검사와 진단, 치료가 결정되기까지 너무 오래 걸려서 기다릴 수 없었다는 답변.
오시기를 잘 하셨다. HER2 양성은 빨리 수술하는게 중요하다. 진행이 빠르니까.

앞으로 이 환자의 치료계획은
항암치료 한번 했으니 7번 남았고 - 뒷쪽 네번에 투여되는 탁솔은 상당히 비싼 약. 보험이 안되면 한번에 150-200만원 정도.
HER2 수용체가 강양성으로 발현되어 있으니 1년간 허셉틴 - 허셉틴 1년 맞는데는 약 5천만원 정도.
부분절제술을 하였으니 방사선 치료 한달반 - 보험이 안되면 700만원 이상.
그리고 6개월에 한번씩 추적관찰 및 관련 검사를 5년간.
(미국은 1년에 한번씩 추적관찰 및 관련 검사를 하도록 권고하지만 우리나라는 6개월에 한번씩 하고 있다. 검사 및 진료비가 싸기 때문. 내 생각에는 6개월에 한번은 환자를 진료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함.)

이 비용을 보험 적용없이 지불하면서 치료를 하려면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될 것 같다.
아침 회진에 가서 환자를 보니
열도 떨어지고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
그래서 난 앞으로 치료계획과 비용문제에 대해 상의했다.
다행히 6월부터는 국내 건강보험 적용이 가능할 것 같다고 한다.
- 이건 내가 잘 모르는 분야데, 아마도 한국인이면서 국내 체류기간 등 모종이 기준이 충족되면 다시 건강보험이 적용되나보다 -
환자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 가운데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하였다.
돈 걱정을 하며 진단과 치료를 늦춘 채 캐나다에 머물러 있지 않고
한국에 와서 수술과 치료를 시작한 것은 아주 잘한 선택이요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비용과 시간을 총체적으로 고려했을 때, 한국 의료시스템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우리나라는 
검사, 수술도 빨리 할 수 있고
국제적 기준에 합당한 최신의 치료 약제를 
보험으로 적용하는
좋은 나라 아닌가?
대답은 예스 아닌가?

예스? 예스? 노?....

암환자는 진료비의 5%밖에 안낸다.
그래서 혈압약, 감기약도 5%만 지불하고 약을 타간다.
그게 정말 한정된 파이를 효과적으로 분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까?
내가
사회학을 공부하다가 의료사회학으로 전환하고
의료사회학을 공부하다가 의사가 되는 길에서 수없이 질문했던 질문들.

그런데 의사가 되고 보니
눈 앞의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도 쉽지 않다.
눈 앞의 환자만 보게 된다. 주위 환자를 둘러볼 틈도, 주위 사회를 둘러볼 틈도 없이...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뜻하는 대로
일을 할 수 없다하여 시스템의 헛점을 논하는
그런 불평쟁이가 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직관력과 분석력은 사라지고
일상의 시계추를 허덕이며 쫒아가기 급급하다. 
이제 빨리 이 화면을 닫고 외래 진료실로 나가봐야겠다. 복잡한 생각은 덮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