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레지던트일기

양치기 EMR, 이번엔 진짜다

슬기엄마 2011. 2. 27. 22:35

양치기 EMR, 이번엔 진짜다

 

2주전부터 ‘D-○이라는 안내문이 병원 곳곳에 붙었다. D-day EMR을 시작하는 11 1일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표현이라 좀 우습기도 했지만, 그만큼 병원 구성원들에게 이 날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려는 노력으로 보였다.

10
31일 밤 10시부터는 기존의 OCS order를 입력하지 못하게 되고, 몇 시간 동안 system shut down 시간이 이어지다가 11 1일 새벽부터 새로운 OCS EMR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

무슨 일이 생기면 당연히 1년차는 매일 당직을 서는 시스템으로 바뀐다. 10 31, 이날은 이제 막 chief가 된 3년차 선생님들까지 집에 가지 못하고 변화가 초래할 혼란을 예상하며 다들 병원을 지켰다
.

System
이 완전히 shut down 되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1년차들은 오후 내내 다음 날 order까지 미리 입력하며 종종 걸음을 치다가 오후 10시를 기해 일단 컴퓨터로부터 떨어져 앉을 수 있었다
.

컴퓨터가 멈추니 오히려 할 일이 없었다. 1년차 무리들은 차라리 일찍 잠을 자고 새벽 3∼4시부터 새 EMR로 예전 기록들이 넘어오는지 monitoring 하다가 새벽 5시가 되면 order를 입력할 수 있도록 준비하기로 했다. 다들 알람을 새벽 3시에 맞춰놓고 잠을 청한다. 3시가 되자 여기 저기서 핸드폰 알람소리로 시끄럽다. 누군가가 컴퓨터 앞에 앉는다. “아직 안 되네. 더 자자.” 다들 불안한 마음으로 선잠을 잔다
.

그렇게 뭉그적거리기를 5 30분까지. 그때까지도 새병원 EMR은 작동되지 않고 있었다. 사실 지난 3월부터 10여 차례의 리허설이 있었고, ‘다음 주면 EMR 시작이라는 말도 수 차례 반복되었기에, 우리들 사이에서는양치기 EMR’로 통하는 판국이었다. 그러니 교육도 설렁설렁 받고, 정작 무엇무엇을 준비하라는 지침이 내려와도 다들설마 하겠어?’라는 심정까지 들었었다
.

새벽 5 30. ‘ EMR이 가동되었다는 전체 방송이 울렸고, 누군가가 말했다. “? 되네. 망했다. 빨리 회진준비 해야겠다라고. 모두들 놀라 컴퓨터를 차지하기 시작한다
.

정말 이 시스템이 가동될 것인가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심리적 저항감도 높았지만, 의사들은 그 특성상 일단 적응하기 시작하면 또 무서운 속도로 적응한다. 병동도 비명을 지르지만,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하기 위해 다들 overtime으로 병동에 남아 일하고 있다. 내가 봤을 때 EMR을 시행하면서 가장 힘들고 복잡해진 것은 간호업무라고 생각되는데
….

오늘은 신환이 10명 왔는데, EMR로 환자를 받고 order를 내고 예전 기록을 찾아보는 데에 예전의 5배 이상 시간이 소모된 듯하다. 너무 바쁜데 당장 fluid order를 못 내고 검사항목을 click하지 못하니 가슴이 활활 타오를 지경이었다
.

1996
, 당시 석사논문을 쓰던 나는 현대, 삼성, 대우 등의 대기업이 대형병원을 짓고 병원산업에 진출하게 되는 현상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 소위 기업형 병원이 등장하는 사회적 맥락과 기업형 병원의 운영이 기존의 병원과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하면서 나는 EMR이라는 용어를 처음 접했다. 의료 정보화가 의사의 직업적 전문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행정, 기술적 측면의 변화가 의사 고유의 권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내용의 몇몇 논문도 읽을 수 있었다. 막상 지금은 EMR이 갖는 철학적인 전환을 생각하기보다는 당장 order를 내고 order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업무가 되어 버렸지만
.

지금 우리 병원에서는 많은 의사와 간호사 등이 예전의 몇 배에 달하는 노력을 들이며 집에도 못 가고 애를 쓰고 있다. 일부에서는 왜 의사가 이런 기술적 문제에까지 세세한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불안정한 시스템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라는 논리로 EMR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또한나도 잘 모르니까’, ‘새로 배우고 익히려면 귀찮으니까라는 명분으로 새 EMR 자체를 거부하는 경향도 있는 듯하다. 안정된 기존 시스템 속에서도 겨우 환자를 보고 있는데, 뭔가가 자꾸 변화하는 불안정한 상황이 의사의 anxiety를 높이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

시간이 흐르고 시스템이 안정되면 분명히 일이 손에 익숙해지고 전체적으로 얻는 이점이 많을 것이라 예상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 우리가 겪어야 할 어려움이 아주 크리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는 없다. 어쨌든 방송에서까지 언급되었던 진료 대혼란은 서서히 정리될 것이다. 아무리 conservative한 성향의 사람이라도 변화의 흐름을 함께 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

나는 의사 집단이 정치적으로 conservative한 성향을 보이는 것은, 환자 진료라는 자신의 일상업무에 쓸데없이 변화가 발생하는 것보다는 현상을 잘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나을 때가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그러나 의사들은양치기 EMR’이 알고 보면 꽤 괜찮은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불과 2∼3일만에 깨달았다. 역시 대단한 적응 능력! 물론 아직은 완전치 않아서, 이 원고도 다운되어버린 컴퓨터 앞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쓰고 있다
.

Medical technology
개선이 medical care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논문은 수도 없이 많다. 언젠가 그 논문들을 한번 리뷰해볼 생각이다. 그러나 그게 언제가 될지…. 아무튼, 그 변화의 흐름의 중심에 내가 있다는 영광스러운 마음이 지금의 혼란을 버틸 수 있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