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마음의 짐 마음의 빚 1 - K 선생님께

슬기엄마 2013. 12. 14. 10:12

K 선생님께 

 

저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제가 그 요청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제 마음의 짐이었습니다. 당신에게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요. 사실 당신이 말한 것처럼 병원에서 일어나는 일을 일종의 문화라는 관점으로 바라보고 병원을 새롭게 디자인해보겠다는 설명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어요. 시스템과 제도가 아닌 문화라아직 완성형이 아닌 상태로 당신이 제작한 비디오 클립을 보고 어렴풋이 어떤 일을 하고 싶어하는지 짐작할 수는 있기는 했지만 말이죠.

 

의사가 된지 몇 년이 되었고 그 후로도 몇 년째 일하고 있지만 암 분야가 아닌 쪽으로 환자 혹은 환자 가족이 되어 다른 병원에 가면 도대체 무슨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특히 큰 병원은 아주 막막하죠. 내가 어느 창구부터 들러야 하는지 언제 돈을 내야 하는지 무슨 검사부터 해야하는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물어보는게 일이니까요. 요즘엔 병원 곳곳에 자원봉사자나 도우미들이 있기는 하지만, 여하간 큰 병원에 가면 정신이 없고 피곤하죠

 

하물며 외래가 아닌 입원을 하게 된 환자들은 얼마나 더 마음이 불안할까요?

당신이 보여준 비디오 클립에서처럼 중심정맥관 삽입, 그 시술 행위 하나에도 매우 복잡한 일들이 얽혀 있고 그 과정더이 얼마나 험란한지, 환자를 배려하지 않고 있는지를 알게 되어 깜짝 놀랐습니다.

중심정맥관 삽입 그 자체를 위해서 입원하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죠. 그리 복잡한 프로세스가 아니기 때문에 외래에서도 할 수 있어요. 당신이 보여준 환자는 입원을 해서 다른 뭔가의 검사, 추가 시술, 치료 등을 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중심정맥관이 필요하니까 입원 후 제일 먼저 이 시술을 받기로 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환자는 입원 후 앞으로도 갈 길이 멀겠죠. 이 시술이 시작이니까요. 환자가 의료진으로부터 중심정맥관 삽입이 왜 필요한지, 어떤 합병증이 발생할 수 있는지, 시술은 언제 하게 되는지, 시술하는 동안 보호자가 있어야 하는지, 시술을 위해 몇시간의 금식이 필요한지 등의 설명을 들었는지의 여부는 비디오에 포함하지 않고 있었지만 아마도 그 과정을 포함했다면 더 충격적이었을지 모르겠어요. 제가 우리 환자한테 하는 걸 생각해 보면 말이죠. (제대로 설명을 잘 안한다는 뜻이죠 ㅠㅠ)   

 

아침에 일어난 환자는 금식을 해야 하는지 하지 않아도 되는지 담당 의사와 간호사의 지시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침 식사가 나오는 바람에 혼란스러워 했고, 정작 언제 시술을 하는지 정확한 시간도 모른채 대기해야만 했으며, 검사실로 가는 동안 이송직원은 계속 다른 전화를 받느라 휠체어를 멈추어 얇은 병원 가운만 입고 이동하는 동안 너무 추워서 감기에 걸리게 되었어요.  한 명의 환자가 의사의 처방 이후 어떤 경험을 하게 되는지, 그 전 과정을 추적하고 병동에 돌아와서 마무리가 되기까지를 보여주고 있는 비디오 클립이었네요.

 

아마도 중심정맥관 삽입이 아니라 입원 후 각과 별로 진행되는 협진을 위해 환자가 언제, 어떻게 검사하고 이동하고 있는지를 살펴봤다면 더 충격적이었을 거에요. 어느 날 밤 한시에 제가 퇴근하고 있었는데 휠체어를 타고 캄캄한 복도에 남겨진 환자를 본 적이 있었어요. 여기서 왜 이러고 계시냐고 했더니 협진 때문에 검사를 한다고 해서 여기 왔는데, 검사를 하고 난 후 그쪽 파트 레지던트는 다른 일이 있다고 가 버리고, 자기를 데리러 병동에서 이송하는 직원을 보냈다는데 한시간이 넘었는데도 오지 않고 있다며 할머니 환자가 울먹거리고 계셔서 제가 병동까지 모셔다 드려야 했던 적도 있었거든요. 그런 일이 흔하지는 않지만 드물지도 않은게 우리 병원 현실입니다. 지금까지도 그렇지요.

 

환자의 경험에 주목하라는 컨셉은 미국 의료시스템에서 시작되게 아닌가 싶어요. 이들은 아찔한 속도로 발전하는 의료기술, 엄청난 자본의 투자, 하드웨어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만족도나 병원, 의료진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지지 않는 이유, 질높은 의료서비스로 연결되지 않는 이유를 분석하였죠. 궁극적으로 환자의 입장에서 환자가 경험하는 의료 현실에 주목하게 되면서 서로의 신뢰가 어긋난 지점을 찾아 메워보려는 시도가 시작된 것 같아요. 세계 최고의 병원이라는 메이요 클리닉, 존스 홉킨스 병원, 엠디엔더슨 암병원, 클리브랜드 클리닉 등 유수의 병원이 의료개혁에 성공하지 못한 이유, 왜 최고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으로 도약하지 못하는가, 엄청난 투자에도 불구하고 환자들은 왜 병원을 신뢰하지 않는가, 이들 일류 병원에게 새로운 생존전략이 필요했고 해결의 실마리를 문화에서 찾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일환으로 환자 경험이 중요하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병원에서 왜 문화에 주목하는가? 그러나 문화(culture)라는 개념은 참으로 포괄적이고 막연한 것 같지만 반대로 구체적인 실례를 찾기가 어렵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 병원도 그런 일환으로 환자의 시각에서 의료서비스를 관찰하고 프로세스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것들이 단지 환자들의 민원 제기가 아니라 환자 경험 이해하기로 생각하려고 하는 것 자체는 어느 정도 발상의 전환이기도 하구요.

 

그런데 이런 노력이 왜 눈에 띄게 성공하지 못하고 있을까요?

 

저는 이제야 비로소 나름의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순전히 제 개인적인 생각이고 근거가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죠.

 

첫째 의사들은 환자의 경험이나 병원의 문화라는 개념에 별로 관심이 없고 병원에서 하는 각종 개혁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는다. (혹은 참여할 시간이 없다)   

둘째 병원의 수익성 창출과 이런 시도들은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다는 인식이 팽배해있다. 안그래도 현재 병원 경영은 적자이며 경제적으로 위기 상황인데 지금 지엽적인 문제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  

셋째 병원 내 수많은 직종들, 부서들별로 이해관계가 달라 특정 문제의식을 공유하기 힘들다.

넷째 문제를 공유하여도 진심을 다하여 일을 해결하기 위해 효과적으로 의사소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우리 병원만의 문제가 아니기도 합니다.

.

그리고 저는 이 중에 네번째 문제가 가장 심각하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우리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진심으로 대화하며 문제를 풀어본 경험이 별로 없어요. 윗사람들은 늘 말하죠. 서슴없이 비판하라고, 어떤 의견이든 받아들이겠다고, 자유롭게 제안하라고. 그러나 아랫사람들은 이미 너무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렇게 자유롭게 얘기했다가 그 후과가 나에게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나를 해칠 것이라는 것을 말이죠.

 

저만해도 그래요. 예전에 레지던트 1년차 때 회식에 가서 저녁을 먹는데 그때 여러 선배 의사들이 있었어요. 누군가가 나에게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냐고, 어떤 분야를 전공으로 하고 싶냐고 물어봤었죠. 그때 전 잘 모르면서도 막연히 내가 가진 꿈 중의 하나로 완화의료(palliative medicine or supportive medicine)’를 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러나 회식을 끝내고 병원으로 돌아온 다음 날 나는 1년차 레지던트로써 또 뭔가 가벼운 사고를 쳤고 빵꾸를 냈던 것 같아요. 그랬더니 대뜸 이런 말을 듣게 되더군요. ‘그게 네가 하려고 했던 supportive care? Supportive care 하는 사람은 일을 그딴 식으로 하는거냐? 남들 하는대로 지금 보는 네 환자나 잘 봐라.’ 저는 그 말이 매우 충격적이었고 다시는 사람들 앞에서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었어요.

 

그러나 그 이후에도 가끔은 어떤 순간에 나를 드러내고 나의 의견을 내 놓고 그리고 시간이 지나 내가 했던 말이 나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와 나를 상처입히는 일이 몇차례 더 있었어요. 다시는 의견을 내지 않겠다, 말 많은 사람은 일만 더 많이 한다, 그냥 일 진행되는 형국을 보면서 적당히 중간만 가자, 괜히 비판했다가 나만 비난받을거야, 회의 때는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게 최고야, 그런 소극적인 인간이 되고 말았죠.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과정으로 위축되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병원에서 의사들은 솔직하게 의견개진을 하지 않는 것 같아요. 의사로 일하는 순간이면 언제라도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가 책임질말만 하는게 낫다, 윗사람이 시키면 그 진위를 따져 의견을 내는 것 보다는 일단 시키는대로 하는게 낫다, 그것이 학문적인 것이든 일상적인 것이든 말이죠. 그저 예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시정하겠습니다. 확인해보겠습니다이런 대답이 윗사람의 심중을 건드리지 않는 좋은 대답인 거에요.

 

그래서 라는 질문을 잃어버리게 되었죠.

그리고 마음이 통하는 몇몇 동기들과 뒷담화를 하는 것으로 내 의견을 분출하는 것으로 끝내고 말죠.

 

의사뿐만 아니라 간호사들도 마찬가지더라구요.

간호사들은 간호사들 내부에서의 업무도 있지만 대부분은 의사들과 일하고 환자 상황에 대해 의사들에게 보고하고 여러 가지 일들을 노티하면서 환자 업무를 실행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환자 진료와 관련된 의견을 개진해도 의사들이 이를 고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간호사를 대놓고 무시하는 일도 자주 있고 어디 간호사가 이런 일까지 나서느냐는 무안을 당하는 등 수없는 경험을 통해 의사들에 대한 불신이 매우 커져 있습니다. 이는 어느 한 병원의 상황이라기 보다는 전반적으로 우리 주변의 문화가 그런 경향을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롭지 않은 의사소통구조는

아무리 제도적으로 혁신적인 프로그램이 시작되어도

인력이 지원되고

돈이 투자되어도

결론적으로 일을 성공하기 어렵게 만드는 원인이 될 것입니다.

의사소통은 단지 말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K 당신이 하는 일에 도움을 못 드려 죄송하다는 변명을 하는 와중에 너무 멀리 돌아왔습니다. 내가 왜 당신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을까 생각하다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다 변명이지만, 그 이유와 과정을 고민하는 것이 저에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당신이 하는 일이 성공하려면

당신이 우리 조직 내부의 사람이었다면,

나 또한 우리 병원 조직의 중심적인 위치에서 일하는 명망있는 사람이었다면,

너무 많은 외래와 환자에 치여 늘 시간을 허덕이며 써야 하는 주니어 스탶이 아니었다면,

나와 함께 일하는 펠로우라도 한명 있었다면,

제가 이렇게까지 무관심하게 굴지는 않았을텐데 라고 변명해 봅니다

 

그러니 좀더 명망있고 시간을 낼 수 있는 높은 선생님을 설득해서 다시 시작해 보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분명히 호의적으로 참여해주실 선생님들이 계실 겁니다. 세상에 어떤 일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철학이 중요하겠지만 사람과 자원을 잘 배분하고 운영하는 정치적 역량도 매우 중요한 성공의 열쇠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마음에 회의적으로 남아있는 주제입니다.

우리가 환자의 눈 높이에서 환자 경험을 중심으로 병원의 문화를 재구성할 수 있을까요?

 

당신의 파이팅을 빌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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