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전이성유방암

아플 시간도 없이

슬기엄마 2013. 5. 14. 19:05


첨부터 유방암 4기.

HER2 양성.

폐전이.

당시 최초 HER2 표적치료제인 허셉틴이 우리나라 전이성 유방암에서 보험허가를 받은지 얼마 안된 때. 

그녀는 운이 좋게 표적치료제를 포함한 항암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1년 반 정도 약효가 유지되다가 폐전이가 다시 악화되었다.

알려진 평균 기간보다 약간 오래 

약효가 유지된 것 같다.


당시에는 (2009년) 2차 치료로 capecitabine 과 lapatinib 이 우리나라에서 보험으로 인정되지 않은 때였다. 마침 HER2를 타겟으로 한 신약 임상연구가 우리병원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지금은 'Emilia (에밀리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연구는 T-DM-1 이라는 신약이 기존 표준요법으로 인정된 capecitabine과 lapatinib 이라는 약에 비해 어느 정도 약효가 좋은지를 입증하는 3상 연구였다. 

이 연구는 작년에 최종 연구결과가 보고되었고 T-DM-1의 약효가 더 좋은 것으로 나와 표준치료보다 우월함을 입증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녀는 그때 T-DM-1 군이 아니라 당시 표준 치료인 capecitabine 과 lapatinib 군으로 배정되었다.


그리고 3년 반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녀는 아마 이 임상연구 생존 곡선의 마지막까지 생존하며 그래프가 꺾이지 않도록 지키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4년 가까이 그 약을 임상연구에서 제공받아 복용하고 있다. 그 사이에 이 약들은 우리나라에서 보험으로 인정되었다. 

이 임상연구에서 T-DM-1 이라는 약이 더 우월한 효과를 보인다는 것이 입증되었기 때문에 이 연구를 주도한 회사에서는 당시 표준치료군으로 배정된 환자들을 대상으로 현재 T-DM-1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병원에서도 예전에 표준치료군으로 배정되어 치료받다가 병이 나빠져서 다른 치료를 받던 중, 연이 닿아 T-DM-1을 제공받고 재치료를 하는 환자가 세명 있다. 그 전에 돌아가신 분들은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녀는 만약 이 약을 쓰다가 병이 나빠지면, T-DM-1 이라는 약을 또다시 무료로 제공받게 된다. 그러면 또 몇 년이라는 시간을 벌 게 될 것이다. 그러는 사이 다른 임상연구가 진행되거나 새로 나오는 약들이 보험으로 인정되면 그녀는 또 다시 시간을 벌게 될 것이다. 


그녀를 보면 

인생은 역시 타이밍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하간 그녀는 표준 치료약으로 4년 가까이 병이 나빠지지 않은 채 유지되고 있다. 흔히 나타나는 수족증후근도 별로 심하지 않다. 용량 감량도 딱 한번 했었는데 그 뒤로 계속 같은 용량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capecitabine 때문에 얼굴이 시커멓다. 하루 종일 햇빛 아래서 일한 사람 같다. 언젠가 그녀에게 시커먼 얼굴색 얘기를 했더니 자기 원래 얼굴 까만 편이었다며 별로 신경 안쓴다고 했다. 쏘 쿨.


약효는 계속 유지되고

독성은 없고

환자는 3주에 한번씩 와서 약을 타간다.

때 되면 CT 찍고 간다. 

외래 진료실에 들어와도 서로간에 할 말이 별로 없다.


피검사도 괜찮고 CT도 괜찮고 다 괜찮네요.


저 가도 되요?


그게 우리 대화의 전부다. 미안하기까지 하다. 


제가 별달리 드릴 말씀이 없어서 죄송하네요.


괜찮아요. 저도 바빠요. 아플 시간도 없이 열심히 살고 있어요. 

의사가 별로 해 줄말 없는 환자가 좋은 거래면서요. 


그녀는 진료실에 들어와서 의자에 앉지도 않고 나갈 준비를 한다. 


그녀에게는 꽤 오랜 시간이 주어질 것 같다.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지금 고등학생이 되었다.

대학도 보내고 군대도 보내고 장가도 보내야 한다고 했다.

그녀의 건강한 웃음, 씩씩한 웃음을 보고 있노라면 

어디가 아픈 사람인지 모르겠다. 

나보다 그녀의 안색이 훨씬 건강해 보인다. 

그녀의 폐에는 여전히 동글동글 전이된 병변이 관찰되지만 그녀가 숨쉬고 뛰어다니고 일하는 어떤 순간에도 그런 것들이 방해가 되지 않는다.


타이밍은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하늘이 준 것만도 아닌

그 무엇이다. 

그녀의 치료 타이밍은 기가 막힌 것 같다. 

그건 어쩌면 그녀의 낙천적인 성격과 웃음 때문 아닐까 짐작해 볼 뿐이다.   


병원오느라 일터에서 허겁지겁 뛰어왔는지

이마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혔다.

나를 만나고는 이내 다시 달려서 일터로 돌아간다. 


인생 최고의 타이밍이 당신과 함께 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