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엄마가 유일하게 물려준 것은 - 슬기의 일기 9

슬기엄마 2012. 9. 25. 17:59

 

계절이 바뀌는 것은 내 몸이 제일 먼저 알아차린다. 환절기가 되는 순간 눈물이 나기 시작한다.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수업시간에도, 청소를 하는 동안에도, 책을 읽을 때도, 자기 직전까지 발작적인 눈물과 콧물이 끊임없이 나를 공격한다. 매일 저녁 알레르기 약을 먹고 자지만, 그 때뿐이다. 원래 그렇다고 한다.

 

학원에서도 쉴 새 없이 코를 훌쩍이다 보니 여간 눈치가 보이는 게 아니다. 눈치가 보이는 것을 넘어 너무 힘들다. 시도 때도 없이 흐르는 콧물을 닦아내다 보니 늘 코가 헐어있다. 친구와 얘길 하다가도, “잠깐만…” 하며 휴지를 찾아 싸해진 코를 틀어막아야 한다. 학교가 산 옆이라 더 심하다. 수업에 집중하고 싶어도 정발산 푸른 정기를 따라 내려오는 여러 종류의 꽃가루가 친구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재채기를 많이 하게 한다.

 

이런 갑작스러운 알레르기 현상이 점심시간에 찾아오면 밥맛이 싹 가실 뿐만 아니라, 내가 밥을 먹는 건지 콧물을 먹는 건지 구분이 안 될 정도다. 계속 훌쩍이다 보면 머리도 아프고 콧물이 목으로 넘어가 맑은 가래도 나오고 목도 아프다. 이렇게 시달리면서까지 학교를 꼭 가야 하는지 회의감이 들 정도이다.

 

나는 여러 면에서 아빠를 많이 닮았는데, 하필 엄마를 닮은 게 바로 이 알레르기 증상이다. 엄마랑 같이 차를 타고 어딜 가다 보면 누가 가족 아니랄까 봐 동시에 재채기를 하며 휴지를 찾는다. 엄마도 예전에 고등학교 때 독서실에 가서 코를 너무 많이 푸는 바람에 항의가 들어와 독서실에서 쫓겨난 적이 있다고 했다. 쯧쯧, 엄마와 나는 이렇게 한 가족임을 증명한다.

 

글을 쓰는 이 순간도 재채기와 콧물 폭풍이 한 바탕 지나가 씨잘을 먹고 왔다. 이제 웬만한 항히스타민제에 대해 잘 안다. 어제 밤에는 갑자기 밤에 콧물이 쏟아져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그래, 내가 효과 직빵인 주사를 가져가마” 했지만 나는 이미 너무 코를 많이 풀고 지쳐서 누워 있다가 잠들어 버렸다. 집에 온 엄마는 나를 깨우더니 자기도 종종 그런 일이 있다면서 이 주사를 맞으면 10분 만에 좋아진다고 주사기를 뜯으며 나에게 주사를 줄 참이다. 나는 알레르기 증상 이후 눈을 뜰 수가 없을 정도로 피곤이 몰려와서 그냥 자겠다고 하고 방에 돌아와 1분 만에 잠든 것 같다.

 

알레르기를 물려 준 엄마의 말에 의하면 환자를 보다가도 갑자기 알레르기 공격이 시작되면 진료를 중단하고 환자들에게 “잠시만요…” 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나가 주사를 맞고 돌아와 진료를 다시 한다고 한다. 얼마나 웃기겠는가? 의사가 환자를 보다가 뛰쳐나가서 주사를 맞고 오다니.

 

엄마는 환절기만 되면 찾아오는 콧물 눈물 발작, 때때로 동반되기도 하는 천식발작 그런 병 때문에 병원을 다녀야 했고 그런 경험을 하는 동안 의료사회학이라는 분야를 찾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공부를 하다가 의대를 가기로 결심했다고 하니, 인생의 경험이 진로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한 것 같다. 엄마가 의사가 된 데에는 본인의 경험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다.

 

의사가 되기 훨씬 전부터 환자의 입장에서 오랜 시간 병을 앓고 고생을 하며 환자로서 시간을 보냈으니 그만큼 좋은 의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역지사지의 경험을 했으니 말이다.

 

나에게 고약한 유전자를 물려준 엄마, 나도 지금의 경험이 내 인생에서 어떤 유용한 도약을 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코에 스프레이 뿌리고 눈에 항히스타민제 안약 넣고 때론 스테로이드 주사까지 맞아가며 견디는 환절기, 내 인생의 보약이 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