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인턴일기

허약한 시스템과 과잉 적응된 개인

슬기엄마 2011. 2. 27. 21:01

허약한 시스템과 과잉 적응된 개인

 

소위의사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환자를 중심으로 사고하고, 환자의 상태를 호전시키는 것을 우선시하는 것이 직업적 윤리에 적합하다(매우 식상한 발언이다).

그러나 한 달 남짓한 병원생활을 겪으며, 여러 과에서 인턴 업무의 중심축이 환자 care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기보다는 의사들 사이의 왜곡된 권위의식과 의국 내 질서의 유지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느낌을 종종 받았다
.

예를 들면 환자에게 왜 수술이 필요한지, 수술은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며 예후와 예상되는 합병증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더 나아가 환자의 직업과 가족 관계 등을 고려했을 때 어떤 점에 유의해야 하는지 등의 내용이 논의되는 시간보다는, 과 내에서 입퇴원 장부를 작성하기 위해 인턴부터 레지던트 4년차까지 밤을 꼬박 새워서 자료를 정리하는 일, 의무기록이 제대로 되지 않은 미비차트를 윗 년차가 쓸 수 있도록 복사실에서 입원차트 200여개를 몽땅 복사해서 의국으로 갖다 나르는 일 등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있다. 의무기록실에 내려와서 쓰면 1∼2시간이면 될 일을 인턴이 6시간 동안 복사를 해서 윗년차에게 갖다주어야 하는 것은 웬 시간낭비, 자원낭비인가
?

수술장 운영을 원활하게 하고 스케줄이 펑크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수술예정일 이틀 전에 전화해서오늘입원해야 한다고 통보를 하고, 그 통보를 받은 환자는 정신없이 입원해서 수술 받고 수술 후 manage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이 불행히도 내가 본 환자들의 현실이었다
.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분명히 개선 가능한 문제점이고 합리적인 대안이 있다고 생각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누구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 대해 모두가 공감하면서,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낼 것인지에 대해서는 머리를 맞대지 못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

이러한 생각에 대해인턴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야. 시간이 지나고 연차가 올라가면 좋아질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윗년차가 되어 뭔가가 좋아진다면 지금의 잘못된 관행을 내 아래의 누군가가 시간과 정렬을 소모하며 하고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일단은 이곳에 적응해야만 생존할 수 있고, 살아남아야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일상의 소소한 문제에 발끈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도 안되겠지만,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나태한 생각으로 살아서도 안 되는 것 아닌가
?

내가 속한 공동체가 합리적인 공간으로 발전하기를 바라고, 내가 하는 일이 사회적으로 유의미하고 인정받는 일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매우 상식적이고 진부한 생각일 것이다. 현재 한국의 의사가 교과서적인 진료를 하기에 많은 정책적 제약이 있고 의료 외적인 압력으로 진료에 어려움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지금은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하고 다방면의 노력이 진행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 기저에서는 전공의 수련 과정이 보이지 않게 특정한 정형화의 틀을 제시한다는 점, 전공의 과정을 통해 의사로서 사회화되고 전문화되어간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내부적인 성찰과 개혁을 위한 노력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어떤 국민도, 어떤 정부도 의사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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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전제된다면 나는 컵라면을 먹다가 finger evacuation을 해야 한다는 병동의 call이 와도 기쁜 마음으로 똥을 파고 돌아와 퍼진 라면을 먹을 수 있는 인턴이 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