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펠로우일기

컴퓨터 의무기록의 시대, 환자 진료에 대한 단상

슬기엄마 2011. 2. 27. 11:50

 

우리병원 전산 시스템은 여러 모로 편리한 점이 많은데, 그 중 하나가 쪽지 기능이다. 모니터를 앞에 두고 보자면 오른쪽 위 구석에 노란색 편지 봉투 아이콘이 있는데 누군가가 나에게 쪽지를 보내면 그 노란봉투가 펼쳐졌다 닫혔다 하면서 깜빡깜빡 사인을 보낸다. 오전 회진이 끝날 무렵이면 파트별로 회진 정리를 하느라 모두들 전화가 불통인데, 이때 아주 급한 게 아니면 전달사항을 쪽지로 보낼 수 있다. 노란봉투를 클릭하면 보낼 사람 이름을 입력할 수 있는 창이 뜨고 이름을 선택한 후 엔터를 치면 쪽지창으로 전환되어 마음껏하고 싶은 말을 적어 보낼 수 있다.

일하다가 화면 오른쪽 구석에서 노란색 봉투가 반짝반짝 사인을 보내면 열어보게 마련이다. 일하다가 힘든 응급실 레지던트 선생님, 목말라요. 응급실 올 때 바나나 우유 부탁해요à나 돈없다’, subspecialty를 정해야 하는 내과 레지던트 선생님, 고민이 많은데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모르겠어요à그래요, 지금이 고민이 많을 때입니다. 그래도 지금이 좋은 때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될거야. 나중에 저녁이나 먹읍시다’, 회진 때 땀을 뻘뻘 흘리며 septic하게 뛰어다니는 내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선생님, 힘들어 보이시네요. 힘 내세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à고마와요. 함박 웃음 아이콘 최고에요이거 연애하기도 딱 좋은 시스템 아닌가! (의도치 않게 직접 그런 쪽지 연애를 목격하기도 했다)

물론 쪽지는 반가운 사람에게만 오는 건 아니다. 보험심사과 선생님, 그때 그 환자는 아무래도 심평원에서 삭감이 예상되니까, 의무기록을 보완해주세요. 그리고 사전승인 신청서도 같이 준비해주시는게 좋겠습니다’, 어느 과에서든 내가 답변해야 하는 파트로 협진을 내면 전산처방시스템 내 협진란과 동시에 쪽지도 날라온다. 협진난 줄 모른척 하면서 답신을 뭉개지 말란 뜻이다. 가끔 넣는 처방에 오류가 있으면 간호사도 쪽지를 보낸다. ‘선생님 그 약은 다른 제형으로 코드가 바뀌었으니 오더 바꿔주세요.’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주치의들과 환자에 대해 직접 얼굴을 맞닥뜨리고 토론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쪽지만 왕창 날리며 회진 정리를 하게 된다는 점이다. 환자에 대한 직접적인 접촉을 하고 있는 주치의들과 같이 환자의 신체검사를 해보고 사진도 같이 보면서 증상과 맞춰보고 치료 방향에 대한 향후 계획에 대해 논의를 하는 것도 시원치 않은 마당에 말이다. ‘누구누구 환자는 뭐뭐 해주고, 누구는 무슨 검사 오늘 꼭 하고…’ 이렇게 사무적인 쪽지를 날리고 오후에는 쪽지대로 명령을 수행했는지 체크하게 되는 경향마저 생긴다. 일수장부 확인하는 것도 아니고병동 주치의 컴퓨터에 앉아서 띄워놓은 쪽지창을 봤는데 하루동안에도 수백개의 쪽지가 오고 있는 것 아닌가! 주치의들은 나 같은 fellow 뿐만 아니라 다른 과에서, 병동 간호사로부터, 병원 내 각종 지위직종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쪽지를 받다보니, 하루 수신량이 엄청났다. 그래서 그들은 쪽지 내용이 길면 잘 읽지 않게 된다고 한다. 나는 전화가 잘 안되면 쪽지에 구시렁 구시렁 내가 해주고 싶은 얘기도 같이 써서 보내곤 했는데, 레지던트들은 아예 그렇게 문장이 길면 읽고 싶지가 않다고 한다.

간호사들은 혈당을 체크한 간이검사결과, I&O, 환자가 원하는 약 이런 노티사항까지도 모두 쪽지를 통해 보고하는 경우도 있었다. 병동 일선에서, 같은 station에서 일하면서도 쪽지를 이용하다니 이거 뭔가 우리의 의사소통방식에 대한 생각을 재고해야 하는건 아닌지 마음이 무겁다.

 

논문을 쓰면서 자료정리를 위해 예전 환자치료를 기록한 의무기록을 살펴보는 것이 fellow 생활의 일과 중 하나인데, 나는 예전의 종이차트를 볼 때마다 선생님들이 환자를 얼마나 꼼꼼히 진료했는지, 약 처방, 검사 처방, 환자 신체검진 결과를 그린 그림, 환자의 주요 정보 및 검사결과에 덧그려진 두꺼운 빨간 동그라미, 형광펜 표시를 보며, 새삼 종이차트의 위력을 깨닫는다. 선생님마다 환자 파악을 일목요연하게 할 수 있는 틀을 갖고 계신 것 같다. 반듯한 정자체로 SOAP에 입각해 십수년간 한 환자를 일관성있게 진료해 오신 역사를 훔쳐볼 때면 그 존경심으로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컴퓨터 전산에서 고딕체와 명조체의 딱딱한 필기체와 고정된 형식에 입각해 정리된 지금의 의무기록과는 다른, 선생님만의 방식으로 강조할 건 강조하고 자유롭게 그림도 그리면서 환자를 정리하고 치료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차트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전산시스템을 이용해 환자 정보를 찾는 것이 예전보다 훨씬 수월하고 편리해졌지만 디지털 화면 안에서는 스승님의 발자취와 흔적을 발견하기 어려워 아쉽다. 레지던트도 현란한 컴퓨터의 기능을 이용해 CT의 중요한 컷도 가져다 붙이고 특정 검사수치의 변화를 그래프로 전환하여 기록으로 옮겨놓고 아무리 긴 환자의 병력도 drag and copy를 이용해 완벽하게 의무기록을 작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drag and copy로는 절대 환자의 다이나믹한 병력을 파악할 수 없다. 완벽한 의무기록을 작성했지만 정작 중요한 환자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20년여년 전 각종 X-ray film, lab 결과지 등을 꼭두 새벽부터 인턴이 찾아서 회진 준비를 하던 시절, 윗년차 레지던트에게 갖은 압력을 받고 결과지를 못 찾으면 off를 없애버리겠다는 협박에도 불구하고 결과지를 찾지 못해 벌당을 섰다는 교수님, 그러는 사이에 텀이 바뀌고 다른 과로 근무가 바뀌에 되었는데, 가운을 바꿔 입으면서 호주머니 속의 잡동사니들을 버리다가 네모로 졉혀져 사각모서리 끝이 다 닮아버린 그때 그 검사 결과지를 발견하셨다고 한다. 이제는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그 정보를 애타게 찾는 사람이 분실된 결과지 때문에 결과를 알 수 없어 속을 끓일 필요는 없게 되었다는 점에서 좋은 시스템이다. 밤새 온 병원을 뒤지며 다른 과에서 슬쩍 들고 가버린 차트를 찾고, 누군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신원의 사람이 컨퍼런스 준비한다며 전체 사진 중에서 몇 장을 들고 가버리셨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교수님 방 열쇠꾸러미를 얻어 온 밤을 지새며 방을 뒤져야 했던 시절도 있었는데그때 소모했던 시간과 노력, 에너지를 더 이상 무식하게 낭비할 필요는 없게 되었지만, 그만큼 남는 시간 동안에 나는 무엇을 더 잘 할 수 있게 되었을까? 그렇게 아낄 수 있게 된 시간만큼 나와 환자를 위해 무엇을, 얼마나 더 잘 할 수 있을지 긴 호흡으로 생각해 봐야겠다.

 

나는 타자속도가 꽤 빠른 편이라고 자부하는 편이지만, 외래에서는 환자 얼굴 한번, 눈 한번을 제대로 맞추면서 진료하기 어려움을 느낀다. 화면에 집중하여 눈으로는 검사결과를 보고 손으로는 계속 자판을 두드리면서 환자가 하는 말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건성으로) 듣기 일쑤다. 오랫동안 초조한 마음으로 진료실 밖 대기시간을 참다가 들어왔는데 정작 의사는 환자 얼굴 한번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은 채 진료를 한다면 환자들이 섭섭하지 않을 수 없겠다. 시대적 변화의 흐름에 뒤쳐지지 않으면서도 옛 선생님들의 진지하고도 진득한 진료방식을 접목시키는 묘안이 필요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