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2009 내가 쓴 책

경희 2. 진단 2. 유방암 진단 후 여러 검사를 받으며

슬기엄마 2011. 3. 4. 21:29

진단 2.

 

양성이라고 생각해서 진단 겸 치료 목적으로 수술을 하기로 했다가 조직검사 결과가 악성으로 나오자, 정확한 진단을 위해 여러가지 검사가 필요하게 되었다. 5살 때 폐렴으로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 처음 하는 입원이었다. 의과대학 학생으로 하얀 가운을 입고 돌아다니는 것이 더 익숙했던 이 병원에서 환자가 되어 하얀 환자복을 입고 병실 침대에 앉아있자니 여긴 내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MRI, PET-CT, 초음파, MUGA 등의 검사를 하고 결과를 기다리며 그 조직 슬라이드가 다른 환자랑 바뀌건 아닐까? 잘못봤을지도 몰라, MRI찍으면 제대로 나올 테니까 그 때까지는 난 ‘R/O(rule out)’ breast cancer 인거야. 암이 아닐수도 있어.’라고 믿으며.

그렇게 며칠을 부정(denial)의 단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MRI PET-CT결과가 나왔다. 확실한 암이었고 게다가 겨드랑이 림프절, 쇄골하림프절, 심지어 내유림프절(internal mammary lymph node)까지 전이되어 있었다. 도대체 림프절 전이가 이렇게 많으면 몇기인거지? 다른 장기로까지 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말이다. MRI PET-CT 촬영이 끝나자 마자 영상의학과에서 서둘러 공식 판독을 해주었는데 잘못 봤을꺼야하면서 환자복을 입은 나는 병동 컴퓨터의 모니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니 이제 더 이상 부정할 수도 없었고 내가 암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었다. 림프절 전이가 많으니 항암치료, 수술, 방사선치료 단 하나도 피할 수가 없었다. 하나쯤은 피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고스란히 3가지를 다 해야 되는구나.

이제 마지막으로 호르몬 수용체(Estrogen receptor, ER; Progesteron receptor, PR) HER2 수용체 결과만 나오면 모든 치료 방향이 결정되리라. ER/PR이 음성으로 나오고 HER2 1+가 나왔다. 정확한 HER-2의 결과를 위해 FISH 결과까지 기다리기로 했고, FISH결과 HER2도 음성이 나왔다. ER/PR이 음성이니 항호르몬제를 쓰지 않아도 되니 좋은건가?, HER2가 음성이니 Herceptin을 쓰지 않아도 되겠구나, HER2 양성이면 뇌전이가 잘 된다고 되어있는데 난 HER2 음성이면 뇌전이도 잘 안된다는건가? 그저 1년차 수준에서 알고 있는 유방암 상식으로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보았을 뿐이다. 모든 검사를 종합한 결과 나는 3기 유방암, 삼중음성타입으로 진단이 되었다. 수술없이 항암치료를 시작하였고, 정작 항암제는 몇분 만에 슉슉 다 맞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유방암 수용체 검사의 의미, 그 정보들이 내 치료방침을 결정하는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삼중음성 유방암(triple negative breast cancer)라는 구분이 있다는 것도 잘 몰랐다. 집으로 돌아와 삼중음성 유방암에 대한 논문들을 찾아보기 전까지는 

집에 돌아와 삼중음성유방암에 대해 찾아보기 전까지는, 유방암을 진단받았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항암치료 받으면 많이 힘들거고, 수술 받으면 한 쪽 가슴이 없어지고, 방사선 치료 받으면 피부색이 변하고 기침이 좀 나겠지만 이 모든 과정이 끝나고 나면 다시 건강해 질거라고만 믿었다. 집에 와서 논문을 찾아보면서 삼중음성 유방암이 다른 유방암보다 예후가 좋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논문에 써있는 ‘aggressive behavior’, ‘poor prognosis’의 단어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리고,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그 때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의과대학을 다니며 퀴블러 로스(E.Kubler Ross)의 죽음의 5단계에 대해 배웠다.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경우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의 순서로 적응하게 된다는 내용으로, 이 순서와 각 단계별 특징을 틀리지 않게 외워 주관식 문제를 맞추는 것이 족보였다. 그렇지만 막상 내가 암환자가 되고 죽음이라는 상황에 직면해보니 시험공부를 하면서 순서를 틀리지 않게 외워야 했던 그 죽음의 5단계는 거짓이었다. 죽음의 위협은 그렇게 5가지 순서를 맞춰 일어나지 않았다. 각각의 단계를 특징짓는 모든 생각들이 한꺼번에 머리 속을 휘저어 놓았다. ‘이건 아니야의 부정, ‘왜 하필 나야?’의 분노, ‘하나님이 더 좋은 의사가 되라고 나에게 잠시 시련을 주신거야 다시 건강해진다면 훨씬 더 좋은 의사가 될거야의 타협, 26살의 결혼도 안한 젊은 여자의 마음속에 콕 박혀버린, 헤어나오기 힘든 우울감, ‘그래도 이제껏 살아온 내 삶에 후회는 없으니, 최선을 다해 치료를 받고 그 결과는 하늘의 뜻에 맡기자는 수용의 감정들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수백 번씩 교차되었다.

모든 치료 과정을 마치고 난 지금에도, 내가 이 모든 상황을 잘 수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다가도, 내가 혹시 암이 아니었던 건 아닐까?, 호르몬 수용체 검사가 틀린게 아닐까? 삼중음성 유방암이 아닌 건 아닐까? 하는 부정의 단계에서 머물 때도, 혼기가 꽉찬 친구들의 결혼식을 다녀오는 날에는 꼭꼭 감춰두었던 우울한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나오고, 충격적인 뉴스를 장식하는 온갖 나쁜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저렇게 나쁜 사람도 병 안걸리고 잘 사는데 왜 하필 나냐는 분노감이 살아난다.

치료를 시작하던 초반에는 이런 생각의 회오리 속에서 혼자 잠 드는 게 두려워 밤이 깊도록, 쏟아지는 잠을 주체할 수 없을 때까지 온갖 드라마 채널을 돌려가며 폐인처럼 미국드라마, 일본드라마에 빠졌고, 친구와 밤을 새워 전화로 수다를 떨기도 했다. 낮에도 뭔가 생각하는게 두려워 그림, 꽃꽂이, 손바느질, 그리고 뜨개질에 빠져 지내야 했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많은 생각을 잊게 해준다. 그래서 옛날 우리 여인들은 전쟁 나간 남편을 기다리며 호롱불 밑에서 조각보를 만들고, 직녀는 베를 짜며 1년에 단 한 번 뿐인 견우와의 만날 날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렇게라도 지금의 나처럼 조금이라도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