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2009 내가 쓴 책

경희 1. 진단 1. 너 유방암이래

슬기엄마 2011. 3. 4. 21:28

진단 1.

너 유방암이래

 

헤어진 연인을 아프지 않고 좋은 추억으로 회상하는 데에 1년이면 충분할까? 처음 유방암 진단받던 날을 슬프지 않게 과거의 일로 회상하는 데에는 1년보다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다. 지금도 진단받기까지의 과정들이 생생하게 생각나고, 가끔 잠을 설치는 날에는 꿈속에서 유방암을 진단받고 치료받던 그 시간들이 되살아나 흠칫 놀란다. ‘잘 견디고 있다.’ ‘난 괜찮아라며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 결국 남에게 나를 보이기 위한 치기어린 자신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2008 10, 내과 레지던트 1년차 생활이 이제 슬슬 손에 익어가고 병원 생활에도 자신감이 생기던 즈음이다. 어느 날 아침 속옷을 입다가 가슴을 스치는데 무언가 덩어리가 만져졌다. 메추리알 만한 크기에 통증도 없고 말랑말랑하며, 요리조리 움직이고 경계가 분명한 촉감이었다. 나에게도 섬유선종이 생겼구나.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설마 암일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난 유방암의 가족력도 없고, 과거력도 없으며 유방암의 위험요소인 빠른 초경, 늦은 폐경, 경구 피임제 등등과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담배는 커녕 술은 입에도 못대는 나에게 암이 생길거라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 그래도 근무 시간을 쪼개 초음파 검사를 받았고, 역시 초음파 검사에서도 양성으로 보인다는 소견이었다. 그래서 2달 후에 다시 검사를 받기로 했고 당분간 경과관찰 하기로 했다.

 

내 몸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지도 모른 채 난 또다시 바쁜 1년차 레지던트의 삶으로 돌아갔고 3개월이 지난 2009 1월의 어느 날, 예전보다 훨씬 커져있는 덩어리를 발견하고 불안하기 시작했다. 12월에 했어야 할 검사를 아직도 안 했다는 것을 깨닫고 윗년차 선생님께 양해를 구한 다음 검사를 받으러 갔다. 촉감은 양성종양의 촉감인데, 크기가 커진다는 것이 불안했다. 초음파 검사에서는 여전히 양성으로 보이지만 크기가 너무 커져서 맘모톰이나 부분마취로는 절제가 힘들고 전신마취를 하여 유방부분절제술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러니 그 전에 조직검사를 일단 해보자고 하셨다. 선생님은 암인거 같지는 않다며 애써 당혹감을 감추셨다. 나도 암은 아니라는데 가슴을 쓸어내리기는 커녕, 혼자 의국침대에 걸터앉아 내 몸에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진작에 알아채고 검사를 받았으면 이렇게까지 수술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동안 젊다고 자만하며 내 몸이 내는 소리에, 내 몸이 변화하는 모습에 귀 기울이지 않고, 눈여겨 봐주지 못했던 일들이 너무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내 몸이, 내 가슴이 그렇게 안쓰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울고 있는데, 윗년차 선생님에게 전화가 왔다. 검사 결과가 어떠냐고 묻는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암은 아닌거 같은데요, 일단 조직검사는 했어요말하고 나니 눈물이 나서 더 이상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수술해야 한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신 선생님이 내 방으로 날 찾아오셨고, 선뜻 병가를 내라고 여기저기에 전화를 하시고 내가 병가를 낼 수 있도록 나의 빈자리를 대신할 사람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2년차 레지던트 되기 한 달 앞두고 병가를 냈다. 그렇게 낸 병가의 시작이 이렇게 오래까지 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가슴에 뭔가 만져지는데 악성인거 같지는 않고 수술만하면 된데요라고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얘기하고 주섬주섬 의국의 짐을 챙겨 병원을 나섰다.

수술날짜를 잡고 오랜만에 집에 가서 이틀은 죽은 듯이 잠만 자고, 엄마가 해주는 맛있는 음식들을 먹으며 조직 슬라이드가 나올 때쯤 해서 병리과에 있는 친구에게 문자로 내 병원 등록번호를 알려주고 오늘쯤 슬라이드가 만들어져서 나올 거 같은데 혹시나 나왔으면 슬라이드 보고 나에게 연락해달라;고 부탁했다. 수술을 앞두고 입원 전날 오랜만에 엄마와 단둘이 집 근처에 있는 근사한 중식당에서 가서 막 점심을 먹으려고 하는데 병리과에 있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경희야, 슬라이드 봤는데, 양성이 아니구 악성이야.”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아무 느낌도 없었다. 그저 멍한 느낌만 있을 뿐. 정말 악성이 맞는건지, 윗년차 선생님이랑 같이 보고 확인한건지, Cell type이 어떤지, nuclear grade는 어떤지 아무것도 물어보지도 못한 채, 아무 생각없이 전화기만 들고 있었다. 그 다음에 친구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솔직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뭔가 힘내라는 얘기를 한 거 같은데 아무 기억이 없다. 하지만 양성이 아니고 악성이야.”라는 소리만 무한반복되어 내 머리속을 맴돌았다. 앞에 앉아 점심을 드시고 있는 엄마에게 얘기를 도저히 꺼낼 수가 없었다. 26살의 결혼도 안한 당신의 어여쁜 딸이 유방암을 진단받았다고 도저히 말씀드릴 수 없었다. 꾸역꾸역 점심을 먹다가 항암치료를 하고 수술을 하고 방사선 치료를 받을 내 모습이 떠오르자 갑자기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엄마는 전화를 끊고 말없이 밥을 먹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뭔가 불길한 느낌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리고 내 눈물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것이다. 살다보면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혼자서 알아차려지는 그러한 일들이 있다. 엄마도 그렇게 알아차렸을 것이다. 유방의 혹은 양성이 아니고 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