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전이성유방암

생강차, 할머니의 사랑

슬기엄마 2013. 12. 23. 19:53


할머니는

3년전 언제부터인가  

당신 유방 모양이 찌글찌글 해지고

언제인가부터 움푹 파인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지만

그런 당신 몸에 대해 자식들에게 일언반구 하지 않으셨다.

다 늙은 나이에

나 아픈거 말해서

먹고 살기 힘든 자식들에게 누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음으로 병을 삭히며 시간을 보냈지만

통증에는 장사 없고

유방에서 진물이 나기 시작하자

할머니는 더 이상 당신 몸을 건사하기 힘들었다. 

처음 온 외래에서 할머니는 내 눈 한번 제대로 맞추지 않고 나를 외면하였다.

검사도 최소한만 하기를 원하셨다.


이제 80을 눈앞에 두신 할머니의 뜻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할머니에게 왜 이제서야 오셨냐고

그렇게 보내버린 3년 때문에

병은 유방에서 뼈로 간으로 폐로 림프절로 옮겨가게 되었고

몸도 말라가기 시작한거 아니냐고

차마 그런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다.


할머니, 제가 약 드리면 드세요.

치료 잘 될거에요.

가능하면 힘든 치료는 안할게요. 

저를 믿고 그냥 이 약 드세요.


그렇게 시작한 유방암 치료.

할머니 유방암 세포는 느릿느릿 나빠지는 세포였던 것 같다.

병이 심했지만 

연세도 있으시고

항암치료까지 해 가면서 살고 싶지 않다는 할머니 뜻도 있어서

호르몬 치료를 시작했다.


유방암 치료의 백미. 

호르몬 치료.

나는 이 호르몬 치료 때문에 유방암을 전공하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왜 이제서야 병원에 왔냐고 환자를 윽박지르지 않아도, 환자가 치료를 위해 큰 결심을 하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치료를 시작할 수 있고

치료 반응이 좋은 환자들이 꽤 많다.

4기 암환자라도 예후가 좋다.  

그렇게 결과가 좋은 이들은 

내가 천하에 명의라서 잘 치료하는 줄 알고 나에게 고마워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의 판단은 대부분 교과서적인 가이드라인에 따라 정해진다. 

 

나는 특별한 재주가 있는 의사가 아니다.

다만 나는 눈치가 빨라 환자들 마음을 잘 알아채는 편이다. 

그래서 '타협'이라기보다는 '협상'의 자세로 환자들과 거래하여 내가 원하는 것을 따낸다.

마음이 얼어버렸던 환자가 치료를 받겠다고 마음을 바꾸는 것이 나의 재주라면 재주가 아닐까 싶다. 




할머니는 

이제 

치료를 시작한지 1년이 다 되어 간다.

사진으로 보는 객관적인 병은 그리 많이 호전된 것 같지는 않지만 주관적으로는 많이 좋아졌다.

할머니는 치료를 시작하고 한달만에 웰빙이 있었고 뼈 통증도 좋아졌으며 유방에서 진물도 나지 않게 되었다. 요즘에는 적당히 살이 올라 피부도 좋아보이고 표정도 밝아졌다. 종양의 크기를 재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치료 효과가 있다. 


요즘에는 밖에 나가도 

내가 환자인지 아무도 몰라.

노인정에 가봐도 내 혈색이 제일 좋은거 같애. 


제가 봐도

피부가 좋으세요.

뭣 좀 바르고 오셨나요? ㅎㅎ


그럼, 병원 올때는 분칠좀 하고 오지 ㅎㅎ


처음 외래 때는 

어디가 아프냐, 약 먹으니 어디가 좋아진거 같냐, 어떤 부작용이 생겼냐 

등등의 내용으로 면담을 했지만

요즘에는 서로 하는 이야기들이 아주 소프트하다. 다 병이 좋아지고 있기 떄문에 가능한 일들이다. 



오늘은 지난번에 찍고 오신 사진에 대해 설명해 드리는 날.

약간 좋아진 것도 같고 비슷한 것도 같고... 종양 수치는 많이 떨어져서 거의 정상범위 내로 들어왔다. 

할머니 컨디션은 여전히 좋고...

이만하면 됐다.


난 이제 설명도 대충한다.


좋아지신거 같아요. 

약 꼬박꼬박 잊지말고 잘 드세요.


사실 그런 말 할 필요가 없다. 할머니는 매일매일 하루도 빼먹지 않고 약을 잘 드시고 계신다.

이런 분이 왜 그렇게 늦게 병원에 오셨나 모르겠다. ㅎㅎ



할머니가 손수 다려오신 생강차와 고명들

 



할머니는 내 설명을 듣는둥 마는둥 당신 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신다.


이건 내가 직접 만든 생강차야. 병 안 났으면 더 많이 해줬을텐데 올해는 별로 많이 못했어.

때 맞춰서 나온 생강을 사서 설탕에 잘 재우면 아주 맛이 좋아. 내가 원래 이거 잘하는데 올해는 별로 많이 못해서 이만큼 밖에 못 가지고 왔어. 생강차 마실 때 대추랑 잣도 꼭 같이 먹어. 고명으로 띄워서. 내가 직접 말려서 만든 대추랑 잣이야. 이런 걸 같이 먹어야 머리도 맑아지고 몸에도 기운이 돌아. 컵에다 생강 원액을 따르고 뜨거운 물을 부어가면서 양을 조절해봐. 자기 입맛에 따라 물 양을 조절하면 되.



지난 번 외래 왔을 때

할머니 유방을 만지며 진찰하던 내 손이 너무 차서 깜짝 놀랐다며

의사선생님 몸에 문제가 생긴거 같다고

집에 가셔서 할머니가 나를 걱정하셨다고 한다.

그럴 때 뜨거운 생강차를 마시는게 좋겠다며 준비해 오신 선물이다.


사진을 보면

여전히 여기저기 병이 많으시다.

그래서 나는 사진을 할머니에게 보여드리지 않는다.

워낙 험악해서.

그렇게 병이 심한 분이 이렇게 정성껏 만든 생강차를 내가 감히 선물로 받아도 되는 걸까? 


외래가 끝나고 허기가 진 탓일까?

난 이렇게 찐하고 맛있는 생강차를 마셔본 적이 없다. 하루 종일 외래 보느라 컬컬해진 목도 뻥 뚤리는 느낌이다. 

나 원래 생강차 싫어하는데... 



사람은

객관적인 것보다

주관적인 그 무엇에 의해 더 강한 존재가 되는 것 같다. 

할머니 기가 생강차에 담겨 나에게 전해지는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으로 깊이 환자의 정을 느낄 때

환자 보는 의사로 일하는 오늘 하루가 너무 소중하다. 


세상에 오만정이 떨어져도

진료실 안에서 환자를 보고 있을 때

내가 행복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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