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레지던트일기

사망 기록지

슬기엄마 2011. 2. 27. 22:18

사망 기록지

 

이 환자 EKG flat 남은 거 없어요?” “아까 사망 시간을 몇 시로 했었죠?” “본적은 어딘가요? 사망진단서는 몇 통 필요하대요?”

환자가 expire하고 나면 주치의는 할 일이 많다. 일단 expire 선언을 하고 나면 가족들에게 적절한 예의를 갖추어 조의를 표한 다음, 잽싸게 station으로 나와 선행사인, 중간사인, 직접사인을 스태프 선생님께 확인 받아 사망진단서도 작성하고, expire note를 쓰기 위해 환자의 chart도 잘 챙겨두어야 한다. 원칙적으로는 expire한 순간에 병동에서 expire note를 써야 하지만,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겠는가! Expire note 마지막에 붙여야 할 flat EKG를 챙기는 일을 잊으면 mortality 발표가 있는 의국회의 때 혼나기 일쑤이므로 반드시 기억할 것
.

밤늦게 챙겨온 chart를 넘기며 expire note를 쓰다 보면 내가 이 사람의 죽음을 이런 식으로 정리해도 되는가 싶은 생각이 든다. 병원에서 사망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리 죽음을 예상하고 신변을 정리할만한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생의 마지막을 맞게 된다. 아주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면 이 사람의 인생을 기록한 문서가 있을 리 만무하다. 또 투병 중에 꾸준히 일기를 써서 자신의 심정과 생애를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그 사람의 생과 사를 공식적인 문서로 기록하는 것은 아마도 내가 쓰는 expire note가 유일하지 않을까? 컴퓨터 자판을 무의식적으로 두드리던 나의 손길이 흠칫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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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력상 **년에 ***병 진단 받고 ****치료하며 f/u 하다가 최근 develop ******증상을 주소로 내원하여 ******치료받았으나 치료에 반응 없고 disease progress 되는 소견 보여 환자 및 가족에게 현 상황 설명하자 추가적인 검사 및 치료 원치 않고 심폐소생술 및 인공기도 삽관하지 않기로 하여 DNR permission 받은 후 conservative care 하다가 자발호흡, 맥박, 동공반사 소실되고 EKG flat 소견 관찰되어 ** * **일 사망 선언함. 선행사인 ** 중간사인 *** 직접사인
****.’

바로 이것이 내가 작성하는 expire note의 전형적인 형식이다. 엊그제 사망한 환자의 expire note도 위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게 작성하여 발표하였다. CML 10년 된 60세 남자로 2년 전부터 Glivec 치료의 indication이 되어 외래에서 복용을 권유하였으나 환자가 거절하고 지내다가 20일간의 poor oral intake, general weakness로 응급실 내원, septic arthritis 진단 받았으나, CML acute crisis 진행된 상태에서 ARF, hepatic failure, pulmonary edema가 순식간에 발생하였고 DNR 상태에서 내원 8일만에 사망한 것으로정리된 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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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원 당시 보호자인 부인은 정서적으로 불안해 보였지만, 왠지 남편의 질병이 진행되어 위험한 상황이 도래했다는 사실에서만 유래된 것은 아닌 듯했다. 환자는 3∼4일간 검사 및 치료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고, 나는 시간을 내서 부인을 만났다. 환자 가정에 최근 발생한 여러 문제들을 지면으로 옮길 수는 없지만 여하간 생의 최대 위기 국면에서 부인은 최종적인 결정을 혼자 내려야 했고 연명치료에 대해 평소 부정적인 의견이 확고했다는 남편의 뜻을 따라 적극적인 치료 없이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는 그가 입원해있던 며칠 동안 회진 시간의 1/3 이상을 그 보호자와 면담하는 데 쓰게 되었고, 숨쉬기 힘들어하고 온 몸이 노랗게 변한 채 퉁퉁 부어있는 그의 육체를 고통스럽게 바라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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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망한 직후. 솔직히 말해이제 회진을 좀 빨리 돌 수 있겠구나’, ‘내일 mortality 발표 준비를 해야겠구나’, ‘EKG flat 안 챙겨놨는데 station에 가면 있을까?’ ‘다른 병원 영안실을 이용한다는데 빨리 진단서를 써야겠구나’, ‘진단서에 선생님 도장이 필요한데 외래 문은 열려 있을까?’ 뭐 이런 생각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채운다. 그런 내가 무섭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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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느냐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반영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가 잘 죽기를 바랬다. Mental status alert할 때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더 나누고, 봐야 할 사람들 있으면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었다. 환자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이런 얘기는 보호자와 충분히 공감대가 형성된 상황에서, 조심스럽게, 정중하게, 최선을 다해 말한다는 느낌을 주면서 말해야 한다. 그러니 회진을 도는 바쁜 시간에 틈을 내어 하기가 어렵다. 그 환자로 인해 나는 며칠 동안 다른 환자들의 progress note 쓰는 것을 뒷전으로 미루고 좀 덜 중한 환자들에게는 신경도 제대로 못 썼다. 그런 걸 보면 죽음이 삶을 규정한다는 말이 맞는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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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mortality를 발표한 한 동기는 형식에 맞추어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고, 그 환자의 past history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혼이 났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 다시 발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명복을 빌어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살아 있는 환자에게 신경을 좀더 쓰는 것이겠지만, 고인의 명복을 기원하는 데에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리라. 평생 얼마나 많은 환자를먼저떠나보내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