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레지던트일기

나는 ‘우수’ 전공의가 되고 싶었다

슬기엄마 2011. 3. 1. 18:06

나는우수전공의가 되고 싶었다

 

나는우수전공의가 되고 싶었다. 환자도 잘 보고, 동료 선후배와 관계도 좋고, 틈틈이 공부도 하고, 이를 바탕으로 논문도 쓸 줄 아는 excellent 한 바로 그런 전공의.

한때는 나도우수하다는 형용사가 나의 존재를 규정하는 상황에 익숙했었다. 그러나 그 한때는 너무 오래 전의 일이 되어 버렸다. 고백하건대, 뒤늦게 의대에 들어오고 인턴과 레지던트를 거치는 동안, 나는 누군가로부터 칭찬받고 인정받고 격려받으며 일하는 상황이 그리 많지 않았다
.

물론우수하다는 것은 지위와 입장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는 측면이 있다. 그리하여 보편적으로 혹은 탁월하게 '우수한' 존재가 아닌 이상 적절하게 인정받기 힘든 것이 전공의 신분인 것 같다.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우수 전공의가 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한 내 좌절감은 별로 위로받지 못한다
.

나는 많이 배웠다


하지만 나는 많이 배웠다. 내가 지금 일하는 병원에서 배운 특히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bedside keeping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됐다는 점이다. 중환이 생겼을 때 환자의 바로 곁에서 vital sign을 체크하고 잠 못 자며 lab f/u하고 medication을 조절하며 환자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었다는 말이다. 이는 교과서에서, 강의에서, 말로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라 같이 부대끼는 동료, 선배들의 실천 속에서 획득되는 중요한 경험이요 기술이자 성실함이다.

내가 일하는 병원조직에 비합리성, 비효율성, 비민주성 등 비판해야 할 측면이 많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켠에 자랑스러워 하는 구석이 있다면 바로 '환자를 보는 법'을 배웠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

그리고 내가 최선을 다했던 환자가, 곧 죽을 것 같았던 환자가, 소변이 하루 종일 한 방울도 안 나오던 환자가 걸어서 퇴원하는 모습을 볼 때, 그가 고맙다며 건네는 음료수 한 박스를 받을 때면 잠못이룬 수많은 밤들은 모두 다 보상이 되고도 남는다
.

늘 허덕이며 많은 환자를 보고, 그러다가 중환이 생기면 그보다 덜한 환자를 제대로 보지 못해 항의를 받는다. 그 과정에서 힘들고 괴롭고 절망적일 때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에서 항상 경중을 따져 급한 일과 덜 급한 일을, 중요한 일과 덜 중요한 일을 가리는 것도 배웠다
.

그래서 집에 못 가고 밤 늦게까지 EMR을 점검하면서 내일의 회진과 할일을 정리하는 것이 전공의의 도리인 것으로 체화시킬 수 있었다. 환자를 보느라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 집에 못가게 되어도 그것이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라고 각인되었다. 그렇게 각인된 습관이 병원에서의 생활을 지겹고 불만스럽지 않게 지낼 수 있게 도와준 것이 아닌가 싶다
.

그러나 초조하다


그러나 객관적인 기준으로우수전공의를 평가하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논문이다. 그것은 비단 전공의 뿐만 아니라 전임의나 직급을 막론한 대학교수들에게도 공히 적용되는 기준이다.

나는 대학원에서 사회학 논문을 쓴 이후 의학논문을 쓴 적이 없다. 당연히 어느 저널엔가 기고한 논문도 없다. 그래서 나의 논문 점수는 빵점이다. 우리 동기 몇 명은 논문, case report 등으로 알뜰히 점수를 챙기고 있는 것도 같다. 물론 나도 아주 가끔은이런 것은 논문을 써 봐도 좋겠다거나나와 같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던 다른 사람은 없는지 자료를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건 정말 순수한학구열비슷한 것이었다. 나는 전문의 시험 응시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남들은 2년차 때부터 논문을 쓰거나 최소한 준비라도 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

그러나 나에게는 공부에 대한 의욕보다 환자를 봐야 한다는 압력이 훨씬 크다. 정말 꼭 필요한 지식을 찾아보는 것 외에는 더욱 포괄적인 배경지식을 학습하고 더 나아가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작업은 생각하기 힘들다. 시간을 투자하고 몸을 소모하며 일하고 났을 때 뭔가 허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것도 이런 상황 때문이리라
.

드물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모든 과정들을 균형적으로 잘 수행하여 부럽기 짝이 없다. 또 더욱 드물지만 환자를 보는 일에는 별로 열정이 없으나, 논문을 쓰거나 자료를 축적하여 뭔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도 사실 부럽다. 그리고 내심 마음 한구석에서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느껴지는 것은, 의사 개인을 평가할 때 bedside keeping에 대한 것보다는 잘 쓰여진 논문 한 편이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지표가 된다는 점이다
.

그러므로 3~4년차가 되면 논문의 압력과 study의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 그리고 내 것을 발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전혀 준비가 안 되어 있다. 2년차도 끝이 보이는 시점이 되니, 마음이 무지 초조하다
.

벌써 절반? 아직 절반?


내가 공부를 안 하고(혹은 못 하고), 논문을 쓰지 않는(혹은 쓰지 못하는) 것이 비단 나 자신의 문제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의 위축된 자아는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나는 이제 곧 3년차가 되고, 뭔가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보다는 책임감있게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지위로 가게 될 것이다.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무엇을 잘 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모든 것을 잘 할 수 없다면 뭔가를 선택해야 할 텐데, 도대체 뭘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

요즘에는 부쩍 그런 존재적 고민을 많이 하게 된다. 모든 면에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뭔가 하나에는우수한전공의가 되고 싶었는데…, 벌써 전공의 시절이 절반 가까이 지났다. 기회가 아직 절반이나 남아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