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이력서

슬기엄마 2013. 12. 28. 19:35

만난지 몇번째

결혼한지 몇년째

몇번째 생일

몇번째 기념일

시간이 가는 것,

횟수가 지나는 것에

별로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내가

블로그 천번째글을 쓰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에 대해 꽤나 의식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누군가 말해 주었다.

하루를 한결같이 살아야 하는 것 처럼

천번째가 되는 그날도 그랬으면,

그래서 특별하지 않은 오늘의 이야기를 쓰는 기록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진심어린 충고를 해 주었다.

그 말이 정답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솔직히 긴장이 되었다.

 

천번째 쓰는 글만큼은

 

나의, 그리고 그 누군가의 심금을 울릴만큼 멋진 글로 소감을 남기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쓰는 글은

내 머리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 생활, 그리고 나라는 존재가 뒹굴고 있는 이 현실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

그러므로 내가 천번째 글을 쓰는 그날의 존재적 조건이

그 글을 결정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환자를 보지 않으면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별로 없다.

그래서 학회를 가면 나는 글을 안 쓴다. 학회장에서 느끼는 점이나 새롭게 배우게 된 지식들을 정리해서 올려보기도 했지만 영 흥이 안나고 글도 잘 써지지 않는다. 그렇게 쓰는 글은 2시간씩 낑낑거려도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그래서 블로그에 1주일 이상 글을 올리지 않는다. 글을 써야겠다는 욕망 (desire) 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

 

 

그러다가도 다시 환자를 보는 순간

머리 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가고

그런 생각들 중의 하나를 모티브로 삼아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을 수첩에 단어 하나로만 적어놓아도

나는 단숨에 한바닥 글을 쓸 수 있다.

'염색' 이라는 단어 하나만 적어놓아도 그날 나에게 항암치료 후 탈모가 되었다가 다시 머리카락이 나기 시작한 환자가 염색해도 되냐는 질문을 하며 동시에 털어놓은 그녀 삶의 이야기가 모두 다 생각난다.

 


나는 그렇게 글을 써 왔다. 매일 일을 마무리하고 밤 1 2시가 넘어도 글을 썼다. 글을 쓰는데 걸리는 시간은 30분에서 한시간 정도. 나는 기승전결을 생각하지 않고, 글의 구성을 생각하지 않고 일필휘지로 글을 써내려 간다. 왜냐하면 내가 쓰는 이야기는 그냥 현실 자체였기 때문에 특별히 메이크업 할 필요가 없었다. 환자를 보며 내가 느낀 것, 내가 들은 것, 내가 생각한 것을 그대로 쓰면 되었다.

 

 

누가 시켜서, 아니면 의무감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글을 쓰고 싶다는 나의 욕망이었다. 아마도 일상을 살아가는 동안 의사로서 느끼는 삶의 불만과 응어리들을 글로 해소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쓰지 않으면 참을 수가 없었나 보다.

 

 

그래서 블로그는 의사로 살아온 내 삶의 이력서와 같은 존재이다.

 

 

누구든 내 블로그를 보면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대충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내가 드러나는 공간이었다.

나는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꾸밀만한 것도

내세울만한 것도

감출 것도 없는

보통 사람이라

블로그를 통해 내가 노출되는 면이 있다 해도 별로 특별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의 솔직한 생각을 담을 수 있었다.

위험한 발언은 스스로 삼가하였다.

누군가를 공격하는 발언도 하지 않았다.

불특정 다수를, 막연한 누군가를, 저 멀리 존재하는 거대한 제도를 욕하기는 쉬웠다. 그래서 나는 딱 그정도만 했다. 구체적인 문제 상황을 지적하고 문제의 핵심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 발언은 나를 위험하게 할 수 있으니까. 나는 아주 안전하게 글을 쓴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블로그는 나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도구가 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쓴 글 때문에 욕을 먹거나 비방을 당하기도 했다. 나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은 꼭 나의 블로그를 인용하였다. 그들은 내가 도덕적 우월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어떤 내용에 대해 분석하고 비판을 하는 것이 '의사로서 나는 잘 하고 있는데 너는 문제가 있는거 아니냐' 그렇게 받아들여지는 측면이 있었던 것 같다. 나의 글쓰기를 부정적인 뉘앙스로 받아들이고 나를 재수없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혹은 의사들끼리나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퍼뜨림으로써 환자를 선동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평가받는 것 또한 내 삶의 이력이 되리라.

 

 

 

904901* 

9420550*

9520551*

9820580*

982215*

201071044*

Y024520*

S******

Y019224*

Y011119*

 

이것은 내 대학시절부터의 학번 그리고 의사로 일하면서 사용했던 병원 아이디들이다.

 

94, 95학번이 나란히 있는 것은, 1994년도에 서울대 사회학과 대학원 시험을 보고 합격했다가 나중에 이대에서 졸업이 안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서울대 입학이 취소된 적이 있었다. 나는 이렇게 대학원을 못가게 되는 것인가 내심 절망하여 여기 저기 입사시험도 보고 떨어지기를 반복하다가 그 이듬해에 다시 대학원 시험을 보고 합격하여 대학원 석사 학번이 2개가 되었다.

98학번이 두개인 것은 하나는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학번이고 하나는 연대의대 학번인데, 의대는 2000년에 본과로 편입했지만 같이 다니는 동기들이 98학번들이라 나도 98학번을 부여받게 되어서 같은 년도 학번이 두개가 되었다.

1990년에 처음 대학에 들어가서 2004 2월에 대학을 졸업했으니 (중간에 비는 기간도 있기는 했지만) 여러 대학을 다니고 또 오래도 다녔다. 지금도 취직을 위해, 혹은 공적인 업무를 위해 서류를 준비하려면 성적 증명서, 경력증명서를 떼는데 시간과 돈이 많이 들고, 증빙서류도 남들보다 훨씬 많다

 

이런 것들이 내 삶의 이력이다.

애초에 시작한 길을 계속 가지 못하고 돌아돌아 오늘의 여기에 이른 것처럼

나는 지금도 이 길을 계속 가지 못하고 어디론가 돌아가게 될 모양이다.

그렇게 돌아가는 길이 가까운 내 미래의 삶의 이력가 되겠지.

이러한 나의 이력이 궁극적으로 나에게 득이 될지 해가 될지는 좀 더 살아봐야 알 것 같다.

 


내가 나의 미래를 컨트롤할 수는 없지만

미래를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는 컨트롤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에 대해

의사가 된 것에 대해

종양내과 의사로 환자를 본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기로 한다.

 


나는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나의 길에서 많이 배웠다.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삶에 대해, 사람에 대해, 사회에 대해, 정의와 도덕에 대해 배웠다.

내가 그 누구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인생에서 나의 중심을 잡고 당당하게 설 수 있게 도와준 것이 사회학이었다.

연대에서 의학에 입문하여 좋은 선생님들, 그리고 선배님들께 많이 배웠다. 내가 그만한 선배, 선생이 되지 못해 부끄러울 뿐이다. 우리 학교, 우리 병원은 지금 여러 모로 한계와 위기에 봉착해 있고 어려움도 많다. 우리가 고작 이런 수준인가 한심하고 부끄럽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이만한 의사로 만들어 준 것, 이만큼 일할 수 있도록 키워 준 것은 우리 학교와 병원 그리고 나의 선생님들이었다.

또한

나는 환자들에게 가장 많이 배웠다.

나는 환자들의 이야기, 그들의 목소리에 귀 귀울여야 하는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부족하고 불완전한 의사의 한계를 메꿔주는 것은 환자들이었다. 그들은 고통받는 존재로서 나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나는 환자들을 통해 병을 이해하고 의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만약 의사가 되지 않고, 한국의 의료를, 환자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학원 시절 공부했던 의료사회학을 계속 공부했었다면 

결코 알 수 없는 사실, 그리고 진실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므로

다소는 평탄치 않았던 나의 지난 시간들, 복잡한 이력을 나쁘게만 보지 않으려고 한다.

 


이제 지난 3년간 세브란스에서 암환자를 진료하며 보냈던 시간을 접고

새로운 삶의 이력서를 쓰게 될 모양이다.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로 한해를 마감하게 되어

내심 불안함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이 시간조차 나에게 어떤 가르침이 될거라고 믿는다.


 

나는

지난 3년간

의사에게 필요한 덕목으로 성실한 자세란 무엇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하였다.

의대생 시절, 레지던트 시절의 최대 관심사는 유능한 의사가 되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능력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성실은 손쉽고 하찮은 것이 아니었다. 의사로서 성실한 자세를 갖춘 사람으로서 살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의사로서 올바른 실천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였다. 진료현장에서 환자를 위해 싸워야 할 때와 물러나야 할 때를 아는 것, 그것은 내가 의사로 일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영원한 숙제로 남을 것이다.

이제 새롭게 다시 생각하는 자세로 지금의 나를 바라보려고 한다

나의 결점, 나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하려는 의지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나는 좋은 의사가 되려고 노력했지만 일단 환자 곁에서 떠나게 되었다. 그 시간이 잠시가 될지 오래 걸릴지, 혹은 영원할지 아직은 모르겠다. 어떻게 되더라도 실패는 아니라고 믿고 싶다.  

 


내가 천번째 글을 이렇게 쓰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인생이라는 것이 본래 이렇게 예기치 못한 일들이 생기고 가르침을 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만큼도 나의 몫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나에게도 한마디 해주고 싶다.

수고 많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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