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인턴일기 22

공연을 마치고

공연을 마치고 나는 요즘 공포의 chest pain 환자들이 줄을 잇는 심장내과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 새벽 5시면 어두컴컴한 병동의 불을 켜고 아침 EKG를 찍는다. 전날 coronary angiography를 시행한 환자들의 puncture site dressing도 회진 전에 끝내야 한다. 평균 10개 정도의 EKG를 30분내로 찍는 것이 나의 목표다. 그렇게 부랴부랴 찍을라치면 어제와 오늘 EKG를 비교하는 진지한 자세는 언감생심이다. 유난히 이른 아침을 시작하는 몇몇과의 인턴들 얘기를 들어보면 routine dressing도 오전 회진 전에 다 마무리해야 하고 chest tube bottle도 ‘깨끗하게’ 비워져 있어야 하고 새벽 5시에 항상 ABGA를 해야 한단다. 어떤 날은 dressing ..

민서 엄마가 준 커피

민서 엄마가 준 커피 내 캐비닛 구석에는 시커멓게 말라붙은 커피자국을 드러낸 빈 병 하나가 있다. 편의점에서 한 병에 3천원이 넘는 값에 팔리는 고급커피다. 이 커피는 내가 소아외과에서 일할 때 만났던 6개월 된 아기 민서의 엄마가 준 것이다. 출생 직후 tracheo-esophageal fistula가 발견되어 수술을 하고, stenosis된 부위에 bougination도 하고, aspiration pneumonia도 생기고, 자꾸 토해서 체중도 늘지 않고, 그래서 민서는 집에 있는 날보다 응급실에 오거나 병원에 입원해 있는 날이 더 많은 아이였다. 처음 민서 엄마를 보았을 때 엄마는 왜 자꾸 X-레이를 찍느냐, 뽑기도 어려운데 피검사는 왜 하느냐, 약을 먹는데도 왜 계속 토하냐는 등 불만 섞인 질문을..

잊을 수 없는 기억들

잊을 수 없는 기억들 초턴 시절, 지방 병원 파견으로 시작한 한 인턴. 그라목손을 먹고 응급실에 온 할아버지 CPR을 한 후 가족들을 모아 놓고 expire 선언을 하다. 역시 초턴 시절, 입고 있는 가운마저 어색하던 때, UGI bleeding 콜을 받고 병동으로 달려갔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간호사에게 이럴 때 어떻게 해야 되냐고 묻자, ‘그건 선생님이 알아서 해야죠‘라며 자기들끼리 station에 모여 농담을 하는 간호사들을 보고 죽여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다. Liver cirrhosis Child-Pugh C로 입원한 할머니, hemorrhoid가 커져 터지기 직전이지만 수술을 하지 못하고 observation하며 지켜보던 중, 어느 날 아침 갑자기 hemorrhoid가 터져 low GI ble..

레지던트 시험이 인생의 전부냐

레지던트 시험이 인생의 전부냐 10여일 전에 전공의 시험을 보았다. 나를 비롯하여 많은 동료들이 불안에 떨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은 모든 결과가 발표되어 시원섭섭하다. 나는 내과에 지원해서 합격했다. 솔직히 참 기뻤다. 예년의 분위기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올해 우리 병원 내과 지원자간의 경쟁은 유례없이 치열하지 않았나 싶다. 의국원이나 교수 면접이 있기는 했지만, 일말의 arrange도 없이 철저히 시험과 인턴근무 성적을 기본으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내가 알기로 많은 동료 지원자들은 성적도 우수하고 인턴 생활도 열심히 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머리 회전 빠르지 않고 순발력 떨어지며 센스 없이 일해 온 나로서는 매일 불안함과 초조함을 견디기 어려웠다. 틈 나는 대로 학교 도서관에 가보지만 내 머리는..

진짜 의사가 된 기분

진짜 의사가 된 기분 물론 나는 올해 초에 의사국가고시를 보고 8만번대 국가가 인정하는 의사면허를 부여받았다. 하지만 인턴 생활을 하는 중에 진짜 의사가 된 기분을 맛본 것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지금 전공의 인력이 부족한 과 중의 하나인 방사선종양학과에서 일을 하고 있다. 대학병원인 만큼 방사선 치료를 필요로 하는 암환자들이 많은데, 레지던트가 부족하기 때문에 인턴에게도 몇몇 중요한 임무가 부여된다. 그리고 이런 임무들은 이제까지 다른 과에서 내가 주로 해 왔던 ‘잡일’과는 달리 머리를 써야 하는 고차원적인 노동을 요구한다는 면에서 새삼 낯설기까지 하다. 나를 가장 신나게 하는 일은 타과에서 의뢰된 환자들의 old 및 OPD chart, chemochart, previous RT chart ..

쓰러질 때까지 일하는 의사들

쓰러질 때까지 일하는 의사들 어렸을 때부터 allergic asthma, rhinitis, conjunctivitis, dermatitis, 심지어 exercise-induced bronchospasm까지 종종 경험했던 나, 요즘처럼 공기가 차가울 때면 어김없이 allergic attack이 찾아온다. Antihistamine을 몇 알씩 한꺼번에 먹어도 소용이 없다. 수술방에서는 마스크 속으로 흐르는 콧물과 재채기를 참기 위해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병실에 들어가면 갑자기 재채기를 하며 코를 훌쩍거리는 나 때문에 이식 환자들이나 면역력이 떨어진 환자들은 꺼림칙한 눈치다. 인턴숙소의 공기가 탁하고 건조한 탓인지 항상 목이 잠겨 있다. 코도 킁킁, 목도 킁킁. 둘러보니 나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한 달째..

아줌마 인턴의 오프

아줌마 인턴의 오프 내 오프는 초등학교 1학년인 딸 슬기가 더 챙긴다. 이 녀석은 내가 거의 1년 내내 every other day로 당직을 선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듯 “엄마, *월 *일날 무슨 일이 있는데 그날 엄마 오프지? 꼭 같이 하기다, 약속!” 이런 식으로 운을 뗀다. 아이의 달력에는 내 오프가 빨간 동그라미로 표시되어 있다. 오프라고 해도 주말 오프가 아닌 이상 귀가 시간은 저녁 8시 이후다. 허겁지겁 늦은 저녁을 먹고 나면 온몸이 노곤해서 씻는 것도 귀찮지만, 모녀 관계가 삭막해지지 않으려면, 슬기 일기 쓰는 것도 봐 주고 숙제도 챙겨주고 같이 목욕이라도 해야 한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요즘은 누구랑 친하게 지내는지, 요즘 관심거리는 무엇인지 등 엄마가 챙겨야 할 일은 많..

권위는 만들어지는 것

권위는 만들어지는 것 아니, 이 자식아, 지금 네가 뭐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 이렇게밖에 못하겠어? 이러다 환자 나빠지면 네가 책임질 거야?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병동 station 앞에서 윗년차 레지던트가 1년차에게 큰 소리로 화를 낸다. 심지어 욕도 한다. 간호사, 환자와 보호자, 지나가던 사람들까지 흘끔흘끔 눈치를 본다. 철제 차트가 날아다니고 종이가 휘날린다. 사실 이런 모습이 일상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심심지 않게 발견된다. Painful memory. 심리적으로 trauma를 입을 만큼 고통스럽게 혼나며 배운 내용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공개적인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자신의 실수나 무능력이 공격당하면 수치심과 자괴감에다 윗년차에 대한 ..

환자가 미워질 때

환자가 미워질 때 코에는 L-tube, 목에는 koken tube, 요도에는 foley catheter, 배에는 PEG, 가슴에는 chest tube, 심지어 항문에는 rectal tube. 대략 이 정도의 tube를 몸에 달고 있는 사람의 상태는 어떨까? ABR? No! 재활의학과 환자들은 이런 관들을 주렁주렁 달고 물리치료, 재활치료를 받으며 병원을 누빈다. 장기입원환자가 많아서인지 이들은 척 보면 내가 인턴인지 아닌지 안다. 내가 dressing이나 ‘인턴 고유의 job(L-tube insertion, ABGA, EKG, foley catheter insertion, nelaton, bladder scan… 아, 이제 이렇게 stat으로 해야 하는 procedure가 솔직히 지겹다)’만을 수행한다는..

젊은이여, 패기를 갖자

젊은이여, 패기를 갖자 초턴일 때는 콜 한번에도 가슴 두근거리며 병동으로 달려간다. 환자 파악도 어렵고 기본 술기를 시행하는 것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애를 쓴다. 두세 달이 지나면 제법 일에 익숙해지고 몇 개의 콜이 쌓여도 당황하지 않으며 전화로 오더를 내리기도 한다. 아주 가끔 진단명을 맞추거나 환자의 병세가 달라지는 sign을 잡아내며 좋아할 때도 있다. 여름을 보내고 나면 어떤 과를 돌아도 비슷한 인턴 job이 지겨워지기 시작한다. 환자 보는 일에도 예전 만한 애정이 생기지 않는다. 중환이 생기거나 내가 잘 모르는 일이 발생해도 윗년차 선생님께 notify하는 것으로 끝날 때가 많다. 찬바람이 부는 요즘, 대부분 인턴의 관심과 고민은 전공 선택에 집중된다. 내부적 고민으로 마음이 심란하니, 평소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