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레지던트일기 36

내 안에 버려야 할 것들

내 안에 버려야 할 것들 2년 전 내가 인턴을 처음 시작할 때, 평일 약제부에서 지정한 시간 이외 혹은 공휴일에 항암제 처방을 내면 인턴이 항암제를 조제했었다. 약제부도 아닌 암병동 한켠에 위치한 조제실에서는, 약제부가 지정한 시간 내에 chemo order를 못 낸 레지던트 때문에(!) 인턴들이 우글우글 모여 chemo mix를 하는 풍경이 자주 연출되곤 했다. 하지만 공휴일에 chemo start 하는 것이 레지던트의 책임이겠는가. 휴일을 앞두고 원무과에서 환자를 입원시킨 거고, routine schedule에 따라 투약하면 되는 chemo를 굳이 일요일이라고 delay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정규 mix 시간이 없는 일요일에도 chemo는 시작되어야 했을 뿐이다. 때문에 인턴들은 다른 일을 미루고 오..

슬기 엄마 파견 가다

슬기 엄마 파견 가다 나는 지금 지방병원으로 파견을 나왔다. 남편은 내게 ‘파견은 레지던트 생활의 꽃(!)’이라고 했다. 결혼 10년째, 집과 남편과 슬기를 남겨두고 혼자 지방에 내려와 있는 것에 대해 충분히 미안하지만, 가벼운 흥분감이 들 정도의 경쾌함도 부인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나를 경쾌하게 하는 것은 본원 생활의 빡빡함에서 해방되었다는 점이리라. 물론 교과서적으로 다짐한다. 이곳 응급실에서 일을 하지만 내가 보는 환자들에게 나는 그 순간 최선을 다하는 주치의가 되어야 한다. 대학병원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환자를 위한 진료 이외에도 신경 쓸 일이 아주 많다. 다소 순발력이 떨어지는 나에게 그런 일들은 약간 버겁다. 내과 내 각 파트별로 notify system이 달라서 환자를 보며 밤새고 고생한 ..

나쁜 소식을 전하는 법

나쁜 소식을 전하는 법 내가 컴퓨터로 글을 쓰고 있는 병동의 바로 옆 환자 휴게실에서는 방금 폐암을 진단 받은 환자의 부인이 애써 울음을 참고 있다. 나는 마치 진단명을 고지함으로써 내 할 일을 다한 것인 양 자리를 빠져나와 병동으로 몸을 피한다. 대학병원이다보니 모든 과에 기본적으로 암환자가 많다.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며칠 전에 시행한 조직검사 결과 악성 종양으로 판정되었습니다’ 혹은 ‘이번에 새로운 증상이 있어 시행한 추가 검사에서 **, **에 전이가 있는 것으로 판정되었습니다. 치료했으나 암이 진행된 것 같습니다’ 류의 나쁜 소식 (환자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과 같은)을 하루에도 수없이 전하는 것이 주된 일과이다. 의과대학 혹은 의사가 되는 어떤 과정에서도 ‘환자에게 어떻게 나쁜 소식을 전할 ..

2년차, 집에 있다가 갑자기 불안해지다

2년차, 집에 있다가 갑자기 불안해지다 3월 1일, 나는 2년차가 되었다. ‘2년차가 되면 정말 좋다’는 말을 여기저기서 들어 왔지만, 정작 나는 뭐가 좋은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더욱이 과연 내가 2년차의 자격이 있기는 한 건지 자신감이 없는지라, 솔직히 변화를 느끼기 힘들다. 당직 일수가 좀 줄었고, 나에게 잔소리하는 사람이 줄었고, 여기 저기 감시의 시선을 덜 느끼게 된다는 점은 2년차가 되어 느끼게 되는 자유로움이지만, 그 외의 것들은 아직 크게 변한 것 같지 않다. 새로운 출발의 발목을 잡는 여러 요인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퇴원요약지와 미비기록 정리인 것 같다. 환자가 퇴원하는 당일 혹은 그 다음날에 퇴원요약지가 정리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오전 회진 후 퇴원 오더를 내고 오전 중에 환..

꿈에 나타난 vocal cord

꿈에 나타난 vocal cord 미국의 외과 전문의 아툴 가완디가 쓴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의 1장에는 저자가 학생 실습 때 Rt. subclavian vein catheter insertion 하는 장면을 처음 목격했을 때의 느낌이 서술되어 있다. 보이지도 않는 혈관을 찾아 catheter를 넣는데 어떻게 puncture가 되는 것이며, catheter 끝은 어떻게 Rt. atrium을 향하고 있는지, 혈관을 찢지 않고 어떻게 advance하는지가 신기할 따름이라는 실습학생의 그 놀라움. 내과 1년차가 되어 환자의 vital sign이 흔들릴 때 intubation을 하고 c-line을 넣는 일들이 순식간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위험해질 수 있는 환자들을 ‘내가 manage해야 한다’는 사실은 한편으..

친절에 대한 양가 감정

친절에 대한 양가 감정 내 이력이 좀 다양하다 보니, 친구들도 다방면에 걸쳐 있다. 학부 친구들은 선생님이 많고, 학보사 친구들은 언론 쪽에 많고, 사회학과 대학원 친구들은 탁월한 분석력으로 여러 곳에 퍼져 있다. 그들 그룹에서 뛰쳐나와 의사가 된 나는 그들과 아주아주 가끔 만난다. 나는 병원 이야기 말고 바깥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나이드신 부모님 때문에 병원 출입이 잦아진 그들은 ‘뭐니뭐니 해도 의사는 친절하고 설명을 잘 해줘야 한다’고 나에게 충고한다. 그들의 말이 백번 옳지만 사실 마음 속으로 울컥 치미는 뭔가가 있다. 40명이 넘는 환자의 주치의로 일하는 한 동기는 오전 내내 보호자와 보험회사 직원과 통화를 번갈아 하며 실갱이를 벌이고 있다. ‘그건 난소의 악성 종양이기는 하지만 난소암은 아닙니..

내가 2년차가 된다고?

내가 2년차가 된다고? 11월29일부터 2006년도 전공의 지원이 시작되었다. 작년 이맘때 나는 내과 지원을 눈앞에 두고 초조한 마음으로 시간나는 대로 도서관을 오가며 애를 쓰고 있었다. 병원마다 과마다 전공의 선발기준에 대한 철학이 다르고 선발의 관행에 나름의 관록이 붙었으므로,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뽑는 것이 적절할 것인가에 대한 정답을 제시하기는 힘들 것이다. 또한 수십년간 같은 분야에서 일하며 환자 진료 및 전공의 선발의 경험을 가진 노(老)선생님의 ‘눈썰미’가 그 어떤 기준보다 정확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성적 이외의 요인들이 객관적으로 평가되기 힘든 의사 선발의 양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이렇게 말하면 “꼭 공부 못하는 애들이 성적 중심주의 운운한다”며 타박을 ..

질병과 낙인

질병과 낙인 교수님이 알면 크게 꾸중하실 일이지만, 솔직히 아직도 난 sterile, Hygiene 등의 개념에 약하다. 그런 나, 지금 감염내과 1년차로 일하고 있다. 처음 학생실습을 감염내과에서 시작하던 당시, 회진이 마라톤처럼 이어지던 인상적인 첫날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며, 그때 만났던 감염내과 전공의 선생님이 그렇게 멋지게 보일 수 없었다. 아, 나도 그런 선배 전공의 의사로 비춰지고 싶은데…. 이런 표현이 좀 그렇지만 온갖 잡균이 가득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감염내과, 내가 환자 등 한번 두드리고, 손 한번 잡는 것이 transmission route가 될 수 있으므로, 누구보다 감염예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VRE 격리병실의 환자를 보다가, HIV 감염환자의 IV line을 start..

양치기 EMR, 이번엔 진짜다

양치기 EMR, 이번엔 진짜다 2주전부터 ‘D-○일’이라는 안내문이 병원 곳곳에 붙었다. D-day는 EMR을 시작하는 11월 1일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표현이라 좀 우습기도 했지만, 그만큼 병원 구성원들에게 이 날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려는 노력으로 보였다. 10월 31일 밤 10시부터는 기존의 OCS에 order를 입력하지 못하게 되고, 몇 시간 동안 system shut down 시간이 이어지다가 11월 1일 새벽부터 새로운 OCS와 EMR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당연히 1년차는 매일 당직을 서는 시스템으로 바뀐다. 10월 31일, 이날은 이제 막 chief가 된 3년차 선생님들까지 집에 가지 못하고 변화가 초래할 혼란을 예상하며 다들 병원을 지켰다. System이 완전히 shut do..

누구에게 최선을 다할 것인가?

누구에게 최선을 다할 것인가? 당직을 서는 밤, 중환이 2∼3명만 되어도 다른 환자에게는 손 딱 끊고 중환 manage로만 온 밤을 지새게 된다. 중환들은 lab도 좋지 않고 한눈에 보아도 안색이 좋지 않아 주치의는 매우 불안하다. Lab도 자주하고 한 번이라도 더 가서 안색을 살핀다. 틈만 나면 OCS를 열어 lab을 확인하고 지금 들어가는 약들을 점검하면서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온 밤을 환자 곁에서 보내고 난 다음날, 환자들이 expire하는 경우도 많다. 의사를 그렇게 옆에 붙잡아 둘 정도로 중한 환자였으니 사망 가능성도 높았겠지만, 내가 낸 lab 하나, 내가 쓴 약 하나가 그의 죽음을 induction했을 가능성을 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