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2 17

오늘 하루는 선물

최선을 다해 살지만그리고 지금 내가 그렇게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조건에 처해 있다는게 다행이라는 걸 알지만그래도 허탈한 마음이 든다.그래도 외롭고 고독하다. 나?아니 우리 모두! 우리 마음 속에는내가 절대적으로 힘든 상황이라는 것을 느끼기 보다는남들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힘들다는 것을 더 느끼는 것 같다.내가 지금 비록 상황이 좋지 않지만 그래도 누구보다는 나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기 쉽상이다.그래서 때론 남의 가슴에 못을 박는 말을 해버리게 된다. 무의식중에 내 뱉은 나의 한마디 말로 그 누군가는 엄청나게 상처를 받는다. 난 그런 실수를 저지르고 산다. 지금 나에게 입원해 있는 환자들 중 대부분이호스피스 환자이다. 의사로서 의학적인 도움을 주기 어려운 상태이다. 증상 조절만 하고 있다.환자를 퇴원시키거나..

대신 청탁

환자는전이성 유방암으로 꽤 오래 치료를 받으셨다.좋아지고 나빠지기를 반복하니때론 우울해하고 슬퍼하고 의기소침해 지기도 했지만 매번 꿋꿋히 힘을 내서 다시 치료 받는 분이다.남편과 아들의 돌봄도 극진하여 내심 내가 참으로 존경하는 가족이기도 했다. 의사입장에서마음이 가는 환자였다. 늘 남편 혹은 아들이 환자 진료에 함께 오셨는데최근 언제부터인가 남편이 오지 않는다. 남편분은 요즘 바쁘신가봐요?최근 들어 병원에 못 오시는거 같네요. 남편이백혈병 진단을 받았어요.지금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어요. 그 다음은 환자가 말을 잇지 못한다. 환자가 울먹이니 더 이상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남편 분 상태는 어떠세요? 담당 선생님은 만나 보셨나요? 내가 물어놓고도 미안하다.지금 내 환자가 그럴 형편은 못되기 때문이..

쓴소리 1

몇일 사이 국시를 앞둔 몇몇 4학년 학생들로부터 편지를 받는다. 어쩐 일인지 나는 강의실 수업으로 종양학이나 유방암에 대해 수업을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가끔 실습을 나온 학생들에게는 종양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암환자를 진료하는 것의 학문적인 측면에 대해 얘기할 기회가 있었지만 강의실에서 주로 수업을 듣는 1,2학년 학생들에게는 임상의학 입문으로 나쁜 소식 전하기, 의사와 환자의 관계, 선택수업으로 있는 호스피스 수업에서 말기암환자에게 항암치료를 하는 것의 의미, Women in Medicine 수업에서 여자의사로 일한다는 것 등의 (소위 마이너) 분야로 수업을 주로 했던 것 같다. 주제가 그래서 그런지, 슬라이드를 많이 만들어서 많은 지식을 전달하는 것 보다는,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질문을 하고 ..

이력서

만난지 몇번째결혼한지 몇년째 몇번째 생일몇번째 기념일시간이 가는 것,횟수가 지나는 것에 별로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내가블로그 천번째글을 쓰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에 대해 꽤나 의식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누군가 말해 주었다.하루를 한결같이 살아야 하는 것 처럼천번째가 되는 그날도 그랬으면, 그래서 특별하지 않은 오늘의 이야기를 쓰는 기록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진심어린 충고를 해 주었다.그 말이 정답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솔직히 긴장이 되었다. 천번째 쓰는 글만큼은 나의, 그리고 그 누군가의 심금을 울릴만큼 멋진 글로 소감을 남기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내가 쓰는 글은 내 머리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 생활, 그리고 나라는 존재가 뒹굴고 있는 이 현실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

사랑보다정이 무섭다.사랑은 한순간의 열정 이후 식어버리지만정은 식지 않는다.일단 정이 들면 미워도 버릴 수 없다.욕하고 심하게 말싸움을 해도 등 돌릴 수가 없다.그게 정이다. 나는 내 환자들에게 정이 들어버렸다.예전에는 환자를 보다가 화가 나면 목에 힘을 꽉 주고 말했었다. 미워서.나를 못살게 굴고내 말 안듣고그랬던 그들이병이 나빠지고 기운이 떨어지면서 생로병사의 외로운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 보면서그리고 그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동행하면서나는 그들에게 정이 들어버렸다. 아마 내가 보는 환자들이 암환자라서 그런 것 같다.조기 유방암 환자들은 항암치료만 받고 훌쩍 떠나버리지만전이성 유방암 환자들은 죽을 때까지 내가 돌봐야 하는 사람들이다.긴 병의 여정에는벼라별 일들이 생긴다.그 모든 것들이 예..

생강차, 할머니의 사랑

할머니는3년전 언제부터인가 당신 유방 모양이 찌글찌글 해지고언제인가부터 움푹 파인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지만그런 당신 몸에 대해 자식들에게 일언반구 하지 않으셨다.다 늙은 나이에나 아픈거 말해서먹고 살기 힘든 자식들에게 누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음으로 병을 삭히며 시간을 보냈지만통증에는 장사 없고유방에서 진물이 나기 시작하자할머니는 더 이상 당신 몸을 건사하기 힘들었다. 처음 온 외래에서 할머니는 내 눈 한번 제대로 맞추지 않고 나를 외면하였다.검사도 최소한만 하기를 원하셨다. 이제 80을 눈앞에 두신 할머니의 뜻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할머니에게 왜 이제서야 오셨냐고그렇게 보내버린 3년 때문에병은 유방에서 뼈로 간으로 폐로 림프절로 옮겨가게 되었고몸도 말라가기 시작한거 아니냐고차마 그..

최선 3

그녀는 나랑 동갑. 뇌로 전이된 지 2년이 되어 간다.뇌 말고는 전이된 곳이 없다. 뇌 수술을 했지만 위치가 너무 깊어서 수술을 완전히 깨끗하게 할 수 없었다. 방사선 치료를 더 했지만 여전히 뇌에는 병이 남아 있다.그대로 놔두니 병이 커지는 것 같아서 젤로다 없이 타이커브만 먹고 있다. 전이된 병의 위치는 우리 몸의 호르몬을 관장하는 Pituitary gland 근처, 그리고 hippocampus.그래서 뇌 수술을 한 후 자기 스스로 필요한 호르몬 분비를 못하기 때문에 각종 호르몬제를 먹고 있다.우리 몸의 호르몬 시스템은 어디가 부족하면 다른 곳에서 이를 자극하는 호르몬이 나오고, 어디가 많으면 다른 곳에서 이를 자극하는 호르몬을 줄여서 균형을 맞추는 조절 기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인위적으로..

최선 2

두 아이의 엄마둘 다 아들.한명은 유치원, 한명은 초등학교.바람 잘 날 없다. 그래서 엄마는 바쁘다.아이들 학교 학원 데려다 주고 데리고 오는 것도 그렇고학부모 모임에 참석하는 것도 그렇고 아이들 과제 봐주는 것도 그렇고 정신이 없다. 유방암 치료를 마친지 2년도 되지 않아 한쪽 폐에 물이 가득찼다. 나는 전날 그녀의 사진을 리뷰해 보고 깜짝 놀랐다.나보다 한참 젊은 그녀. 내일 그녀를 어떻게 만나나.얼마나 절망하고 힘들어 하고 있을까.마음이 무겁다. 그런데 다음날 외래에서 처음 만난 그녀.나는 그녀를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그녀는 나한테 오랫만이라고 인사한다. 저 선생님 알아요. 예전에 항암치료 받다가 열나서 입원했을 때 선생님 본 적 있어요. 저 그때는 선생님 환자는 아니었거든요.제 옆에 입원한 환자 ..

최선 1

딸이 엄마 대신 외래에 왔다. 멀리 시골서 사는 엄마.서울 사는 딸네 집에 오셨다. 요즘 들어 소화가 잘 안되는 거 같다는 엄마의 한마디.딸은 시골 가시기 전에 내시경 검사라도 한번 받고 내려가시라며 엄마 등을 떠밀어 내시경 검사를 받게 하였다.그렇게 진단받은 위암, 엉겁결에 수술을 받았다.수술을 하러 들어가보니 CT에서 보이는 것보다 복막 전이가 훨씬 심했다. 나이도 많고몸도 약한 엄마. 항암치료를 받으셔야 한다고 한다.엄마는 '수술 했으니 당연히 항암치료를 받아야지' 하신다.딸은 엄마한테 4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수술 다 받았으니 빨리 집으로 가야 한다, 집을 너무 오래 비웠다, 마음이 급하다며 퇴원하자마자 당신 혼자 버스타고 시골 집으로 돌아가셨다. 딸은 걱정이 되서 매일 엄마에게 전화를 한다...

마음속 구상 1

가능하면 매일 블로그에 일기처럼 글을 썼다.블로그에 쓴 글은 아주 솔직하게 내 심정을 진솔하게 담아 쓴 것처럼 보이지만사실 그런 것은 아니다. 내부 검열. 이 글은 일단 내 환자가 보고 있고 다른 병원 환자들도 보고 있고, 동료 의사도 보고 있고, 내 윗사람도 보고 있다. 나를 모르는 그 누구도 내가 쓴 글을 통해 나를 읽어낼 수 있으므로 나 스스로 내부 검열을 하고 내 보낸다.적당히 나를 드러내는 것 같지만나의 속마음을 다 털어놓을 수 없다.상당히 정치적으로 판단하여 글을 쓰고 올리는 셈이다.어차피 우리는 여러개의 가면을 바꿔쓰면서 사는 존재니 특별할 것도 없다. 나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건/사안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편이었다.내 이야기의 본질이 무엇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도 가느다란 실마리만 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