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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밤 샐 수 있다

엄마는힘들 때 쏘주 마시면서 견디고 일했던 것 같다.아빠랑 싸우고 화가 나면 쏘주를 마시면서 집안 대청소, 철 지난 옷 정리를 하셨고몸이 힘든데 겨울 김장을 잔뜩 해야할 때도 쏘주를 마시면서 하룻밤을 훌쩍 넘겨 혼자 힘으로 김장을 다 하시곤 했다.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픈데 아파서 죽겠다고 하면서도 몸에는 힘이 남아 있어그 아픈걸 다 견디고 일할 수 있다고 했다.그래서 엄마는 사람이 '힘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어떤 연구 결과에서도 나왔듯이허벅지는 근육 뿐만 아니라 지방도 힘이 된다고 하니아마도 내 힘의 근원은 허벅지가 아닌가 싶다.뱃심도 나날이 두둑해지고 있다. 난 아직 힘이 좋다. 그래서연휴 내내 베짱이처럼 놀다가 연휴 마지막 밤을 꼴딱 세고 밀린 일을 했다.'꼼꼼히' 했으면 몇일 걸려도 부족할 ..

연휴의 마지막 밤

슬기가 쉼없이 골골댄다. 시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다. 코가 꽉 막혀 코로 숨을 못 쉬고 입으로 숨을 쉰다. 그래서 입술이 갈라지고 부르텄다.편도도 엄청 부어서 라이트를 비추지 않고도 편도에 궤양까지 다 보인다. (슬기 편도는 내가 본 편도 중에 가장 심하게 붓는다.)누런 코가 나오는 걸 보니 만성 축농증이 또 악화된 것 같다. 연휴라 항생제도 못 먹고 그냥 식염수로 세척만 하고 있다. 자꾸 코를 푸니까 머리도 울리고 무겁다고 한다. 기냥 누워서 TV 본다. 좋아하는 사이다도 입맛이 써서 못 먹겠다고 하니 할말 없다. 뭣 좀 먹어볼래? 물어도 손사래를 친다.애가 안 먹으니 기분이 영 환장하겠다. 엄마는 한달만에 7-8kg 정도 몸무게가 빠져버렸다. 갑자기 몸무게가 빠지니 기운..

일상을 다시 시작하다

일면식이 없는 한 선생님의 메시지를 받고블로그 글쓰기를 다시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왜 그런 마음이 들었을까요? 컴맹인 제가 블로그 초기 화면을 Reset 했습니다. 예전 블로그는 '한쪽가슴으로 사랑하기' 책과 같은 디자인으로 만들어 졌습니다.그때는 청년의사 양광모 선생님이 다 만들어주셨지요. 예쁘게 편집도 잘 해주셨구요. 한쪽가슴으로 사랑하기는 제가 Fellow 1년차였던 2009년 한해 동안 유방암 항암치료 수술 방사선치료를 받았던 후배 박경희와 함께 쓴 글을 모아2010년 6월에 출간한 책입니다. 책을 쓰기로 결심했던 시점에는 내과 의국 후배인 경희가 병에 굴하지 않고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하였지만 정작 책을 쓰는 과정에서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게 되었고경희와 비슷하게 유방암 치료를 받는 환..

2014 갑오년 첫날

올해는 갑오년. 120년전 1894년은 갑오농민전쟁으로 시작하였다. 이어서 조선을 차지하겠다는 일본과 중국의 청일전쟁이 우리 땅에서 벌어졌다. 어이없는 전쟁. 왜 남의 나라 이권 다툼을 왜 우리땅에서 하도록 놔둔 것인가? 그리고 갑오개혁. 120년전 갑오년은 역사의 격변기. 그리고 비극의 근현대사의 발원지가 되었다. 사람마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 대해 다른 코드로 읽고 해석한다. 그것이 오늘의 우리. 오늘 시작한 갑오년은 어떤 한해가 될까? 전봉준 황동규 1손금 접어두고 눈 오는 남루 寒天에 법도 없고 겁도 없는 논 땅 위에 깔리는 허연 눈가루 마음에 짓밟는 형제의 손. 2눈떠라 눈떠라 참담한 시대가 온다. 동편도 서편도 치닫는 바람 먼저 떠난 자 혼자 죽는 바라 同列에 흐느낄 때 만나는 사람. “눈떠라 ..

오늘 하루는 선물

최선을 다해 살지만그리고 지금 내가 그렇게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조건에 처해 있다는게 다행이라는 걸 알지만그래도 허탈한 마음이 든다.그래도 외롭고 고독하다. 나?아니 우리 모두! 우리 마음 속에는내가 절대적으로 힘든 상황이라는 것을 느끼기 보다는남들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힘들다는 것을 더 느끼는 것 같다.내가 지금 비록 상황이 좋지 않지만 그래도 누구보다는 나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기 쉽상이다.그래서 때론 남의 가슴에 못을 박는 말을 해버리게 된다. 무의식중에 내 뱉은 나의 한마디 말로 그 누군가는 엄청나게 상처를 받는다. 난 그런 실수를 저지르고 산다. 지금 나에게 입원해 있는 환자들 중 대부분이호스피스 환자이다. 의사로서 의학적인 도움을 주기 어려운 상태이다. 증상 조절만 하고 있다.환자를 퇴원시키거나..

대신 청탁

환자는전이성 유방암으로 꽤 오래 치료를 받으셨다.좋아지고 나빠지기를 반복하니때론 우울해하고 슬퍼하고 의기소침해 지기도 했지만 매번 꿋꿋히 힘을 내서 다시 치료 받는 분이다.남편과 아들의 돌봄도 극진하여 내심 내가 참으로 존경하는 가족이기도 했다. 의사입장에서마음이 가는 환자였다. 늘 남편 혹은 아들이 환자 진료에 함께 오셨는데최근 언제부터인가 남편이 오지 않는다. 남편분은 요즘 바쁘신가봐요?최근 들어 병원에 못 오시는거 같네요. 남편이백혈병 진단을 받았어요.지금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어요. 그 다음은 환자가 말을 잇지 못한다. 환자가 울먹이니 더 이상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남편 분 상태는 어떠세요? 담당 선생님은 만나 보셨나요? 내가 물어놓고도 미안하다.지금 내 환자가 그럴 형편은 못되기 때문이..

쓴소리 1

몇일 사이 국시를 앞둔 몇몇 4학년 학생들로부터 편지를 받는다. 어쩐 일인지 나는 강의실 수업으로 종양학이나 유방암에 대해 수업을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가끔 실습을 나온 학생들에게는 종양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암환자를 진료하는 것의 학문적인 측면에 대해 얘기할 기회가 있었지만 강의실에서 주로 수업을 듣는 1,2학년 학생들에게는 임상의학 입문으로 나쁜 소식 전하기, 의사와 환자의 관계, 선택수업으로 있는 호스피스 수업에서 말기암환자에게 항암치료를 하는 것의 의미, Women in Medicine 수업에서 여자의사로 일한다는 것 등의 (소위 마이너) 분야로 수업을 주로 했던 것 같다. 주제가 그래서 그런지, 슬라이드를 많이 만들어서 많은 지식을 전달하는 것 보다는,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질문을 하고 ..

이력서

만난지 몇번째결혼한지 몇년째 몇번째 생일몇번째 기념일시간이 가는 것,횟수가 지나는 것에 별로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내가블로그 천번째글을 쓰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에 대해 꽤나 의식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누군가 말해 주었다.하루를 한결같이 살아야 하는 것 처럼천번째가 되는 그날도 그랬으면, 그래서 특별하지 않은 오늘의 이야기를 쓰는 기록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진심어린 충고를 해 주었다.그 말이 정답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솔직히 긴장이 되었다. 천번째 쓰는 글만큼은 나의, 그리고 그 누군가의 심금을 울릴만큼 멋진 글로 소감을 남기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내가 쓰는 글은 내 머리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 생활, 그리고 나라는 존재가 뒹굴고 있는 이 현실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

사랑보다정이 무섭다.사랑은 한순간의 열정 이후 식어버리지만정은 식지 않는다.일단 정이 들면 미워도 버릴 수 없다.욕하고 심하게 말싸움을 해도 등 돌릴 수가 없다.그게 정이다. 나는 내 환자들에게 정이 들어버렸다.예전에는 환자를 보다가 화가 나면 목에 힘을 꽉 주고 말했었다. 미워서.나를 못살게 굴고내 말 안듣고그랬던 그들이병이 나빠지고 기운이 떨어지면서 생로병사의 외로운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 보면서그리고 그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동행하면서나는 그들에게 정이 들어버렸다. 아마 내가 보는 환자들이 암환자라서 그런 것 같다.조기 유방암 환자들은 항암치료만 받고 훌쩍 떠나버리지만전이성 유방암 환자들은 죽을 때까지 내가 돌봐야 하는 사람들이다.긴 병의 여정에는벼라별 일들이 생긴다.그 모든 것들이 예..

생강차, 할머니의 사랑

할머니는3년전 언제부터인가 당신 유방 모양이 찌글찌글 해지고언제인가부터 움푹 파인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지만그런 당신 몸에 대해 자식들에게 일언반구 하지 않으셨다.다 늙은 나이에나 아픈거 말해서먹고 살기 힘든 자식들에게 누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음으로 병을 삭히며 시간을 보냈지만통증에는 장사 없고유방에서 진물이 나기 시작하자할머니는 더 이상 당신 몸을 건사하기 힘들었다. 처음 온 외래에서 할머니는 내 눈 한번 제대로 맞추지 않고 나를 외면하였다.검사도 최소한만 하기를 원하셨다. 이제 80을 눈앞에 두신 할머니의 뜻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할머니에게 왜 이제서야 오셨냐고그렇게 보내버린 3년 때문에병은 유방에서 뼈로 간으로 폐로 림프절로 옮겨가게 되었고몸도 말라가기 시작한거 아니냐고차마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