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조기유방암

졸업 축사

슬기엄마 2012. 10. 16. 22:16

 

 

한국 임상 암학회 내 유방암 분과 모임이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에 있는데

여기 가면 유방암을 주로 보시는 다른 병원 선생님들을 만나게 된다.

어쩌면 우리 병원 우리 과에서 다른 암을 진료하시는 선생님들보다 유방암 분과에서 만나는 다른 병원 선생님들이 제 심정을 잘 이해하실지도 모르겠다. 같은 병을 진료하는 의사라서 쉽게 공감대가 형성된다. 아, 그거! 척 하면 척 통한다. 그런 느낌을 받기 때문에 난 이 모임에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나간다.

위로도 받고 도움도 얻을 수 있으니 내가 기다리는 모임이기도 하다.

아마 그만큼 유방암 환자를 진료한다는 것은 다른 암과 다른 어떤 특징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방암은

쓸 수 있는 약제도 매우 다양하고 - 항암제, 항호르몬제, 표적치료제

같은 유방암이지만 호르몬, HER2 수용체 종류에 따라 그 생물학적 특징도 다양하게 나타나고

다른 암에 비해 환자들 나이도 젊고

컨디션도 좋고

치료의 의지도 강하고 실재 치료 성적도 좋고

또 젊은 여자 환자가 많기 때문에 심리적, 육체적으로 겪는 어려움도 크고

가족관계 내에서 엄마가 점하는 위치는 때문에 겪는 어려움도 크고

그런 요인들이 치료적 세팅에서 작용하는 영향력도 크고

그래서 의사-환자 관계가 더욱 중요한 것 같다.

 

그래서

제가 가장 두려워 하는 바로 그것,

의사의 한마디가 치료를 받는 환자에게 미치는 영향이 참 큰 것도 같다.

 

유방암 분과 모임에 가면

정식 모임 전후로

 

선생님, 이러이러한 환자가 있는데요,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치료하시겠어요?

선생님, 그 약 써보시니까 어때요? 이론적인 거 말고 현실적으로 독성이 어떻게 나타나나요?

선생님, 그 약 선생님 병원에서도 삭감되었나요? 어떻게 하죠? 말도 안되요.

선생님, 이러이러한 치료를 계속 하고 있는데요, 이 치료를 유지하는게 맞는 걸까요, 아니면 이제 그만 해도 될까요?

선생님, 이러이러한 경우에 외과나 방사선 종양학과, 방사선과랑 어떻게 커뮤니케이션 하고 계세요?

 

내가 진료하면서 겪는 어려움을

나보다 경험도 많으시고 환자도 많이 보시는 선생님들께 조곤조곤 질문드린다.

 

내가 어렵게 어렵게 고민해서 시행한 검사와 치료가 제대로 된건지 그런 것들에 대한 의견을 들어본다. 내 실력의 부족함에 부끄러움을 느낄 새가 없다. 환자에게 필요한 정보니까 그냥 안면몰수하고 의견을 여쭤본다.

어떤 치료는 정답이 있지만

어떤 치료는 정답이 없기 때문에 전문가들의 의견 수렴, 합의(consensus)가 중요할 때가 많다.

 

식사를 하는 동안

유방암 분과장님을 맡고 계신 아산병원 정경해 선생님께 여쭤본다.

 

선생님, 선생님은 수술 후 항암치료를 다 받은 환자들에게 의사로서 어떤 말씀을 해주시나요?

 

졸업 축사.

 

졸업 축사요?

 

응. 항암치료 졸업하는 거니까.

이제 세상에 나가서 더 잘살라고 혼도 내주고 격려도 해주지.

 

내용이 뭔데요?

 

뭐 뭐 뭐 뭐 먹지 말고

뭐 뭐 뭐 뭐 하지 말고

열심히 운동하고

쓸데 없는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살라고.

 

선생님께서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졸업 축사를 받아 적고 싶다.

대본을 만들어서 나도 그렇게 한번 해주고 싶다.

 

선생님과는 달리

준비된 축사없이 치료를 마치고 졸업하고 날 떠난 환자가

6개월만에 종합검사를 하고 결과를 들으러 외래에 오셨다.

(우리 병원은 항암치료가 끝나면 외과에서 추적관찰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임상연구 등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항암치료 후 내 외래는 잡지 않는다.)

그녀는 외과 외래를 보러 왔다가 내 방에 잠깐 들른 것 같다. 내 진료 시간 중 환자와 환자 사이 진료가 잠시 빈 틈을 노려 커피와 빵을 사다주고 간다.

 

마지막 항암치료 진료 때

내가 그동안 고생하셨다고 초콜렛을 드렸더니,

당신은 빈 손이라며 그가 너무 미안한 표정을 지었던 게 기억이 난다.

 

그녀는 내가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 모른다면 아메리카노와 카페라떼 둘 다 사오셨다.

따뜻하게 막 구워진 빵과 구수한 커피가 어울러진 냄새.

항암치료 졸업생의 선물.

당신이 하신 말씀을 지키실려고,

그리고 나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실려고 사온 선물.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

그리고 마음은 더 부르다.

 

나와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 하는 인연.

나도 그들을 위해 멋진 졸업 축사를 준비해야겠다.

 

우리

이제 다시는 만나지 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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