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펠로우일기

의사가 청진을 하면서 꼭 들어야 할 소리

슬기엄마 2011. 2. 27. 11:38

의사가 청진을 하면서 꼭 들어야 할 소리

 

폐암 환자를 볼 때 예전에는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호흡음에 변화가 있는지, 심장 잡음은 없는지 주의깊게 듣는게 중요했지만 요즘 의사는 그것 외에도 2가지 소리를 더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 지갑의 두께를 짐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폐암에 대한 신약 표적치료제를 자기 부담으로 지불하고 쓸 여유가 되는지 미리 파악해야 합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자에게 비싼 약을 추천하면 환자가 너무나 속상해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환자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의사가 제안하는 고가의 항암제를 쓰겠다고 선뜻 대답했다가 몇 년 지난 다음에 심사평가원에 고소를 할만한 사람은 아닌지 미리 예측할 수 있어야 의사 생활 오래 할 수 있습니다” (국립암센터 이진수 원장님, 2009 11 26일 국회 항암정책포험 중에)

 

약값이 좀 비싸지만 꼭 썼으면 합니다” “사정상 그 약을 쓸 형편이 못됩니다…”

 

HER2 유전자가 과다발현되는 유방암 환자에서 허셉틴(Herceptin)이라는 약은 유방암 환자의 예후를 가름할 수 있는 결정적이고도 효과적인 약제이기 때문에 HER2 유전자 과발현 환자에서 이 약을 처방하지 않는다는 것은 종양학과 의사 사이에서는 중죄(!)에 해당할 것이다. 표적치료제의 대명사처럼 불리워지는 허셉틴이라는 이 약은 1998년 미국 FDA에서 승인을 받았고 우리나라에서는 2003년부터 재발성, 전이성 유방암 환자에게 보험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허셉틴 단독으로는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탁센(Taxane)계열의 항암제와 병행해서 사용하게 되는데, 고가의 허셉틴에 대해 보험 적용을 해주다보니 탁센은 보험을 적용하지 않고 있다. 허셉틴을 비보험으로 투약할 경우 한달 환자들의 비용부담이 130-180만원 정도드는데, 보험이 되면 이중 5% (얼마전까지만해도 10%)만을 지불하는 셈이니 얼마나 싼가! 탁센 계열의 약물 중 가장 싼 약제로 선택하면 대략 40~50만원 정도를 부담하게 되니 요즘 이 약제를 포함한 요범으로 치료를 받게 되면 한달에 항암제 가격만 60만원 정도가 든다. 보험이 안되던 시절에는 140-150만원 정도가 들었을텐데 2배 이상의 차이가 나는 셈이다.

허셉틴이 보험적용이 되기 전에도 이미 종양내과 의사들은 대규모 연구결과를 통해 생존률 향상에 큰 도움을 주는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보험적용이 안되던 시대에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이 약을 투여할 것을 권유하였을 것이다. HER2 유전자 과발현 유방암의 특징은 나이가 젊은 여성에서 빠른 속도로 재발하고, 재발 후 급격하게 악화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주로 뇌로 전이되어 생존률을 떨어뜨리고 죽기 전 삶의 질이 순식간에 망가지게 된다. 이미 2005년에는 전이성 유방암이 아닌, 완치를 목적으로 한 수술을 받은 환자 중 HER2 유전자가 과다발현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면 예방적으로 허셉틴을 썼을 때 이후 재발율은 2배 이상 낮춘다는 보고가 나왔지만, 우리나라는 2009 7월에 임프절양성의 조건을 가진 환자로 제한하여 보험으로 사용을 승인할 수 있게 되었다. 특정 약제가 보편으로 사용되던 시기와 그렇지 않던 시기를 나누어 생존률의 차이가 있음을 보고하는 메타 연구분석들이 있는데, 아마 우리나라는 보험으로 인정해주던 시기와 보험이 적용되지 않던 시기를 나누어 분석하는게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인간 생명이 갖는 가치의 무한함 versus 경제적 자원의 유한함

 

앞으로 항암제는 정상세포를 포함한 모든 세포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세포 독성 약제(cytotoxic drug) 보다는 특정 신호전달체계 상에서 암세포에서만 발현되는 단백질이나 신호를 감지하여 암세포만 공격할 수 있는 약제가 주로 개발될 것이다. 치료 효과를 드라마틱하게 향상시킬 것으로 예상되는 약제들도 꽤 있다. 정상 세포를 공격하지 않기 때문에 항암제 독성도 상대적으로 낮아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환자들의 삶의 질도 잘 보존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약은 거의 대부분 보험이 안되기 때문에 한달에 수백만원을 개인돈으로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그만큼의 비용부담을 짊어질 수 있는 서민들은 많지 않다. 이십년 이상 암환자 치료에 종사하고 계신 모 선생님은 자신의 경험상 전이성 대장암 치료에서 표준치료에 혈관생성 억제제를 추가하는 것이 독성은 무시할만 것에 비해 생존률을 향상시키는데 도움이 되고 치료 효과가 좋다는 설명을 100명의 환자에게 하면 5명 남짓이 신약을 쓸 수 있다고 하신다. 여러 국제적인 치료 가이드라인에서 이 신약을 더하는 것을 대장암의 표준치료로 제시하고 있으나 우리 나라 보험에서 급여가 제한되고 있으니 뻔히 좋은 약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쓰지 못하는 환자가 훨씬 많아, 효과적이고 새로운 치료법이 개발되면 이를 환자에게 설명하는 것이 의사에게도, 설명을 듣는 환자에게도 고통이 되는 현실이다. 다국적 기업에서 개발한 신약들의 효능이 입증되고 좋은 약제가 많이 나올수록 (또 그만큼 비싼 약들이 개발되면) 우리는 계속 고통을 받을 수 밖에 없는가? 이제 특정 약제를 보험으로 쓰게 해달라는 주장을 하기에는 좋은’ ‘신약쏟아지고있는데 이를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암환자의 진료 비용부담을 20%에서 10%, 10%에서 5%로 낮추면 중산층 암환자들이 비급여 신약을 치료제로 결정하는데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인가? 모든 신약을 다 보험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제한된 자원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우선순위는 누가, 어떻게 결정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정답은 없다. 환자에게 어떤 약을 쓸 것인가는 지극히 의학적 질문이지만 그 대답을 얻는 과정에는 사회적 합의(consensus)가 필요한 것이다.

 

그동안 할말 많았다

 

종양내과는 다른 내과의사들에 비해, 예를 들면 내시경초음파, 혈관촬영술 등 활발한 술기를 병행하며 진료하는 내과의사들에 비해 육체적 활동성이 낮은 경향을 보인다. 주로 책상 앞에 앉아 일하고 환자 차트를 뒤적이며 논문을 준비하고,어떤 약을 쓸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시간이 일과의 대부분일 것이다. 다른 과와 집담회를 하거나 학회에 가거나 하는 활동들도 거의 책상과 의자 앞에서 이루어지니 특별히 기분전환할 아이템이 없다. 머리속에 쌓여있던 고민과 불만, 그리고 분노가 조심스럽게 표출된 곳이 있었으니 11 26일 국회에서 열린 1회 항암정책포럼 : 항암제 보장성 강화의 방향을 주제로 한 세미나였다. 세상물정 모르고 열심히 환자보고, 열심히 연구활동하는데 여념이 없으신 줄만 알았던 종양학과 대 선배 의사선생님들이 많이 참석하셨다. 부족한 현실이지만 내 앞에 있는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으로 자리에 오셨으리라고 생각한다. 다만 세상일은 최선을 다하려는 순수한 마음만으로 변화되지 않으며 치밀한 계산과 사회적 주장, 그리고 정치적 세력화를 동반했을 때 변화가 가능하다는 면에서 야속하다. 좋은 약이 있으니 보다 많은 환자들에게 그 혜택을 주고, 내가 치료하는 환자가 잘 나을 수 있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소박한 마음을 제도화하기 위해서는 여러 경로를 거쳐가야 할 것이다. 전체 인구대비 해당 질환이 차지하는 비율, 질병의 중등도를 고려하여 재원의 cost to benefit ratio를 따져봐야 한다. 정책 결정권자들과 끊임없이 논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사회적 발언이 일상화될 수 있는 루트도 준비되는 것이 좋겠다.

특별한 사회적 압력이나 이벤트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우리 의료 환경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시작되고 중요한 자리가 마련되었다고 믿고 싶다. 정작 국민은 그 자리에 없었고, 여전히 정책 결정권을 가진 쪽에서는 일방적인 주장이 반복되며 여전히 의사가 돈문제 운운하면 논의와 상관없이 제약회사 리베이트에 대한 책임론 운운하며 논의의 핵심을 비껴가는 토론문화가 극복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l  이번 원고의 많은 표현은 항암제 보장성 강화의 방향포럼에서 여러 선생님들이 개진하신 의견을 인용한 부분이 많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표기하지 못해 주장의 저작권에 문제가 생기지 않기를 기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