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레지던트일기

병원으로 호적을 옮겨서라도 간호할껴

슬기엄마 2011. 3. 1. 18:27

병원으로 호적을 옮겨서라도 간호할껴

 

아이구, 속이 쓰려. 왜 이렇게 속이 쓰린겨?”
위장 보호하는 약을 여러 가지로 쓰고 있는데도 그렇네요. 보험이 안 되더라도…(Proton pump inhibitor를 한번 써볼까요
?)”
갑자기 할아버지가 내 말을 막으며 나를 병실 밖으로 끌어낸다
.
선생님, 비보험으로 약 쓴다고 하면 우리 할망구가 약 안 쓴다고 그려. 그러니 암말 말고 내가 싸인헐 텐게 그냥 줘. 비보험이라도 속 풀리는 데 도움이 되면 써야지.”

말기 환자들의 고통
내가 요즘 주로 보는 위암 환자들은 말기가 되면 대개 복막으로 암이 진행되어 암종증의 상태가 되며 이로 인해 장 폐색이나 장 마비가 오는 경우가 많다. 배가 빵빵하게 불러오고 물 한 모금만 마셔도 토하기 때문에 결국 L-tube를 꽂고 suction하는 기계를 연결하여 decompression을 해준다. 호전되면 다시 음식 먹기를 시도해보고, 다시 불러지면 다시 decompression하는 과정을 몇 차례씩 반복하는 사이 환자와 보호자는 지쳐가고 전신 상태도 악화되기 십상이다. 21세기 첨단 의료의 시대에 장 마비가 온 환자들에게 도움을 줄 만한 특별한 약이나 시술 없이 물리적인 decompression밖에 할 게 없다는 사실이 나도 이해가 안 되는데, 환자들은 얼마나 절망을 느낄까 싶다. 못 먹고 사지는 빼빼 말라가는데 배만 불룩해져 있는 환자들이 할아버지는 그런 할머니 옆에서 도움이 된다면 돈 걱정하지 말고 뭐든지 해달라고 말씀하시지만 살림살이가 그리 넉넉해 보이지는 않는다. 결국 상태가 호전되지 않고 이렇게 계시다가 돌아가실 확률이 많다는 말에 할아버지는 눈물을 글썽거린다.
그래도 하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달라고 내 손을 잡는데, 죽어가는 환자를 보면서도 별다른 느낌 없이 삭막해지고 메말라버린 내 마음이 꿈찔한다
.
학습지 영어 선생님을 하던 40대 초반의 여성, 그런 환자들은 나에게 언니뻘이다. 두경부 암을 진단받고 수술을 했지만 1년만에 재발하고 수술부위를 중심으로 재발된 암과 농양이 뒤엉켜 감염치료, 항암치료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상태이다. 구강구조에 병이 생기다보니 기도와 식도의 입구가 구분되지 않아 tracheostomy, gastric tube insertion을 한 다음 항암치료 받을 준비를 한다. 어떻게든 치료를 받겠다는 의지가 높지만 외형적으로 행색이 말이 아니고,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니 환자 삶의 질도 말이 아니다. 목에 있는 구멍을 막아야만 자신의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상황 자체가 그를 참으로 이질적 존재로 느끼게 만든다. 잦은 기침과 가래…, 이 젊은 여자 환자는 암을 진단받은 후 이혼을 했고 설암의 특성상 자신의 원래 직업인 영어교사를 계속 할 수도 없었다. 혀를 너무 많이 써서 암이 생긴 것 아니냐고 말하는 친정어머니는 회진 후 찾아와 병원비 걱정부터 하는 자신을 자책하고 있다.

암 발생과 가족관계의 변화
과연 암의 발생은 혼인상태 및 가족관계를 변화시키는가? Marital status cancer에 대한 여러 논문에서는 일관된 결론을 내지 않고 있으나 통계적 유의도를 근거로 하여 암의 발생 자체가 부부관계를 악화시키거나 이혼을 유발하는 것은 아니며 암 발생 이전의 부부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주장을 접할 수 있다. 과연 암의 발생 이후 변화된 가족, 부부관계의 문제를 통계가 얼마나 유의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도구가 될지 모르겠다. 무엇으로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을까?
삶의 catastrophic event라고 할 수 있는 암-진단된 암의 severity에 따라 다르겠지만-을 진단받았을 때 경제적, 육체적, 정신적으로 지지해 줄 수 있는 1차적인 집단이 가족이고 결혼했다면 부부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아직까지 병원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은 할아버지, 아저씨가 투병을 할 때 할머니, 아줌마들이 곁에서 간호하는 모습이다. 물론 극진한 할아버지, 아저씨들이 예전보다는 많아진 것도 사실이다. 조금이라도 더 먹이려고 이 음식, 저 음식을 해 오고, 옆에서 닦아주고 씻어주고, 같이 산책해주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영화처럼 우아하지는 않아도 부부간의 사랑이 무엇인지, 부부란 어떤 존재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
암 진단 후 이혼당하고 혼자 투병하는 환자의 쓸쓸함은 그 무엇으로도 채워줄 수 없는 공허함과 함께 힘겨움을 더한다. 용기를 북돋워주고 정서적으로 충분한 지지가 있어도 항암치료를 받는 과정은 힘들다. 그렇게 혼자 남은 젊은 여자환자들을 보면 결혼식 때 혼인 서약은 뭐하러 하나 싶은 억하심정이 든다. 질병의 발생과 치료 과정에 가족이 짊어져야 하는 부담이 큰 것도 우리나라의 독특한 특징이기도 하겠지만, 아무리 첨단의 의료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다 하더하도 힘들고 뻥 뚫린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은 가족의 사랑일 것인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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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의료기관에서 말기암환자, 회복가능성 낮은 환자를 검사 및 시술의 계획 없이 L-tube만 꽂고 기다리며 계속 입원시키기는 어렵다. 처음에 말했던 할아버지는 내게 이런 말도 했었다. “병원으로 호적을 옮겨서라도 간호할껴.” 그 말씀에 가슴 깊숙이 눈물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