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죽음을 준비하는 환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112

엄마의 일기장

기도했건만 온 가족이 노력했건만 엄마는 힘겹게 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돌아가셨다. 아직 많이 늙지 않은 엄마. 아직 많이 크지 않은 동생. 아직 어른이 될 준비가 부족한 나. 인생의 모든 것을 완전히 누리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를 미쳐 하지 못한 상태에서 엄마는 돌아가시고 자식들은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가지고 어색하게 일상으로 돌아갔다. 3월 새학기를 맞이하기 전에 시간맞춰서 돌아가신 것 같다. 3월부터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는 엄마의 당부이실까? 엄마의 일기장을 통해 엄마 생애의 마지막 심정을 유추해 본다. 끝까지 자식걱정 진로를 정하지 못한 고등학생 딸과의 실갱이 몸이 좀 나아지만 뭘 해봐야겠다는 결심 그리고 일기장 한 구석에는 몸을 좀 추스리게 되면 나를 만나고 싶다며 내 이름 석자를 적어놓으셨..

언제 나쁜 소식을 전해야 할까

각종 치료 가이드라인에서 전이성 유방암 환자의 치료를 언제 그만 둘 것이냐에 대해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의견은 세가지 각기 다른 용법으로 치료했으나 연속적으로 반응이 없을 때이다. 그렇게 약제 반응이 좋지 않을 때는 추가적인 치료를 해도 약제의 반응을 기대하기보다는 독성에 의한 환자의 손해가 더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생존기간을 연장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고 환자 삶의 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더 이상의 치료는 권고하지 않고 있다. 약제 반응율은 치료 초반기 일수록 좋기 때문이다. 치료 후반기로 갈수록 약제에 감수성이 높은 세포보다는 저항적인 세포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런 원칙을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 환자의 컨디션이 너무 좋을 때 치료 독성이 심하지 않을 때..

고생 많았어요

아침 회진 시간, 전공의와 대화 ** 씨는 혈압, 맥박, 호흡수가 어떠어떠한 상태입니다. 의식은 명료하지 못한 상태이고, 진통제 및 승압제는 같은 용량으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아직 안 돌아가셨어요? 네... 어제 호흡 양상 봐서는 금방 돌아가실 거 같았는데... 네. 잘 견디시는 것 같습니다. 빨리 돌아가셔야 할텐데... 누가 들으면 깜짝 놀랄 대화이다. 환자를 두고 빨리 돌아가셔야 할텐데 의사가 그런 얘기를 하다니... 그러나 환자가 빨리 돌아가시기를 바라는 게 솔직한 나의 마음이었다. 환자는 나보다 한참 어린 젊은 남자. 아주 천천히 자라는 육종을 진단받았다. 그를 처음 만난 건 지금으로부터 5년전. 치프 레지던트로 일할 때이다. 너무 잘 생겨서 같이 치프 레지던트로 일하던 홍양과 나는 그의 팬이 되..

처음으로 찍는 사진

6살 난 아이. 태어날 때부터 근육병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고개를 가누고 앉지 못합니다. 근육병에 이은 이차적 합병증으로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겼습니다. 요즘은 일주일에 세번씩 투석을 하며 비교적 안정적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감기 한번만 걸리면 바로 중환자실 행입니다. 두살 위 오빠가 동생을 끔찍히 아낍니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동생이 앉을 수 있도록 옆에 앉아 지지대가 되어 줍니다. 30대 중반의 엄마는 너무 많이 지쳐있습니다. 눈물도 말라버린 엄마. 많이 쇠약해진 아이는 언제 하늘나라로 떠날지 모르는 운명입니다. 그것에 대해 엄마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아이가 떠나면 엄마는 아이를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요? 아이의 사진이 한장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엄마의 마음에 순간 찬바람이 붑니다..

서로 맞잡은 손

오늘 우리 병원 호스피스팀의 마지막 팀 미팅이 있었다. 호스피스 팀에서 올 한해를 결산하는 슬라이드를 보여주셨다. 슬라이드 첫장은 서로 맞잡은 손. 이 사진은 우리 호스피스 팀의 서민정 간호사가 직접 찍은 우리 환자와 가족의 사진이다. 얼굴 사진을 찍겠다고 하면 다들 부담스러워 하시는데에 비해 손 사진은 훨씬 덜 부담스러워 하신다고 한다. 환자와 가족에게 '손 잡아보세요' 하면 사람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손을 잡는다고 한다. 관계맺음의 방식이 마음의 엮임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겠지. (파일로 작게 올려서 지금 보니 그 감동이 덜한데) 큰 화면으로 이 사진을 처음 보는 순간, 가슴이 울컥 했다. 손가락 마디마디 결 따라 환자와 가족이 짊어지고 간 고생의 결이 느껴진다. 힘들고 지쳐도 우린 가족이니까 두 손..

모진 말

아무리 정성껏, 조심해서 말해도 모진 말이 있다. 더 이상 치료는 안하는게 좋겠습니다. 환자에게 별로 도움이 안 될 거 같습니다. 앞으로는 검사도 안할거구요 편안히 계실 수 있도록 하는 조치만 할거에요. 몸 컨디션이 조금이라도 괜찮을 때 퇴원하셔서 집에서 시간을 보내세요. 지금 컨디션이 제일 좋은 걸지도 몰라요. 주변 정리도 하시고 만날 사람도 좀 만나시고... 아침 회진 돌면서는 이런 말을 안하려고 애쓰는 편이다. 다인실에 입원한 환자는 다른 환자들이 옆에 있어서 우리 회진 상황을 뻔히 다 보고 있고 우리끼리 나누는 얘기를 다 들을 수도 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그런 얘기를 하지 안하려고 애쓰는 편이다. 이런 말은 따로 면담 시간을 잡고 조용하고 방해받지 않는 공간에서 하려고 애를 써본다. 우리 입원 병..

기적의 책갈피

오늘 우리병원 사회사업팀에서 주관하는 기적의 책갈피 모임이 있었다. 추상적으로 말하면 내가 어떤 환자를 위해, 어떤 조직을 위해 내 마음 다하여 지향하고 사람들에게 내 마음을 전하여 그를 위해/ 그 조직을 위해 여러 사람의 마음을 모은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다. 한달 동안.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책갈피를 누군가에게 준다. 그러면 그가 나에게 이 책갈피를 선물로 받고 나에게 답례로 어떤 선물을 준다. 그러면 나는 그 선물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준다. 그러면 그는 그 선물을 받고 나에게 또 다른 선물을 준다. 그러면 나는 또 그 선물을 또또 다른 누군가에 준다.... 이렇게 한달동안 나를 매개로 하여 선물이 오고 간다. 손을 거칠 때마다 더 좋은 선물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그러면 궁극적으로 내가 지향했던 사람..

마사지 한번 받아보세요

온 몸이 뻐근하다. 잔뜩 긴장하고 책상 앞에서 일을 한 탓인지 양 어깨에 귀신이 앉아 있는 것처럼 무겁다. 늙은 의대생 시절, 나에게 가끔 마사지를 해주는 동기가 있었다. 쉬는 시간이면 이 노쇠한 언니를 위해 자기 쉬는 시간을 할애하여 내 어깨도 주물러 주고 척추뼈도 두들겨주고 나를 그렇게 만져주었다. 그러나 가끔. 마사지를 하는 사람도 힘드니까. 자기의 에너지를 나에게 주는 것이니까. 그녀가 긴장해 있는 내 목 주위 근육을 주물러 주면 탄식이 절로 나온다. 아이고 시원하다. 마사지를 통해 우리 몸의 긴장을 풀어주는 것은 여러 모로 도움이 된다. 아이들이 배아프면 엄마들이 손으로 배를 살살 문질러 주며 엄마손 약손을 해준다. 그 온도와 터치가 주는 에너지로 아이들 배가 낫는다. 항암제로 인한 손발저림 항..

한 마디

그녀가 퇴원한건 몇 일전이다. 복수 조절을 위해 임시적으로 관을 넣고 잘 못 먹으니 영양제 맞고 약을 바꿔 항암치료를 시작해 볼까 하는데 환자가 몇일 더 쉬었다가 치료를 했으면 한다고 했다. 나도 동의했다. 이번에 젬자를 많고 전신무력감이 심하게 왔다. 좀 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 그렇게 3일 정도 입원했다가 퇴원했다. 걸어서. 혼자. 그녀는 재발된 전이성 유방암으로 5년이 넘게 치료 받고 있었다. 좀 나빠져도 항암치료를 하면 다시 좋아지고 또 운이 닿아 신약 임상연구에 참여할 기회도 많아 여러가지 신약을 많이 쓸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그렇지만 약을 쓰면 좋아져도 시간이 지나 저항성이 생기면 또 나빠지기를 반복. 그러나 그녀는 컨디션이 좋았다. 병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도 초달관 스타일. 이번 약..

동영상으로 엄마를 찍는 아들

아주 아주 착한 아들이 있다. 원래 그는 취업 준비 중이었다. 1년전 엄마가 전이성 대장암을 진단받은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빠짐없이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다닌다. 증상에 따라 진통제 용량이 바뀌니까 진통제 복용일지도 잘 적어 온다. 엄마가 불편한 곳이 많아 약도 엄청 다양하고 많은데, 그걸 종류별로 잘 챙긴다. 어떤 증상 때문에 약을 더 드셨으니까 그 약은 몇일치가 부족하고 어떤 증상은 요즘 호전되서 약을 안 먹고 있으니 처방 안해줘도 되고 때에 따라 약 처방 일수가 넘치기도 하고 부족하기도 한데 그런걸 아주 꼼꼼히 아주 잘 챙긴다. 흉수 복수 관이 있을 땐 그 소독도 자기가 챙긴다. 엄마가 이것저것 투정을 많이 부리는데 마치 오빠처럼 그 투정을 다 받아주며 엄마 수발을 들어주었다. 그러던 엄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