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빛이 나는 얼굴

슬기엄마 2013. 12. 7. 19:35



아마도 나는 피곤에 찌든 얼굴을 하고 사나보다.

외래를 보러 온 환자들이 진료가 끝나면 

병원 내 커피집에 가서 커피를 사서 외래방에 넣어주고 간다.

커피를 선물한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도 않고 가시는 경우도 많다.  

아마도 내 몰골이 너무 피곤해 보이니 

이거 마시고 정신 차리라는 뜻 혹은 졸지 말라고. 


나이 사십이 넘으면 그 사람 인생이 얼굴에 반영된다고 했다.

그래서 사십이 넘으면 얼굴에 책임을 지라는 말이 있다.

진실된 마음이 중요하지 외모가, 얼굴이 전부는 아니라고 말들 하지만

첫인상, 관상이라는 것도 중요하다.

그 사람이 평소에 어떤 방식으로 사는지, 어떤 철학으로 삶을 꾸려가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일상의 습속(habitus)들이 얼굴에, 외모에 반영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내가 비록 멋드러진 화장술 (내지는 변장술)을 뽐내지는 못할지언정  

최소한 

비비크림을 발라 다크 써클을 숨기고

립그로스를 발라 창백한 입술을 숨기는게 필요하다.

그것이 환자를 대하는 의사의 예의일 것이다.


그러나 

파렴치한 나는

365일 (곱지 않은) 쌩얼로

후줄그레한 외모로 

바쁜 일과를 핑게대며 창백한 유령처럼 병원을 떠돈다.

환자가 보기에도

그런 의사,

별로일 것 같다.


아무리 진심으로 정성껏 환자를 진료하고

엄청난 실력이 있다 해도

가운을 입은 상태에서 의사로 일하는 순간에는 

어느 정도 갖추어진 옷맵시와 품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래서 학생실습 때부터 수많은 규제와 규율, 잔소리들이 따라다니는 것 같다. 




환자도 마찬가지다.

단정한 옷 매무새. 연한 화장으로 메이크업 하고 외래에 오시는 분. 

힘들고 고단한 항암치료 기간이지만 자기 자신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치료기간 중 진짜 낯빛이 어떤지 보는 것이 필요하니 화장하지 말고 외래에 오라는 선생님들도 계시지만)

난 그렇게 자신을 꾸미고 단장하고 오는 환자들이 좋다.

마음의 강인함이 느껴진다. 


어머, 오늘 어쩜 이리 고우세요?


좀 찍어 발랐어요. 호호


조금만 치장해도 분위기가 완전 달라지는군요.

역시 여자는 좀 꾸며야 하나봐요. 호호


제가 병원 올 때 얼마나 신경쓰는데요?

선생님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요.


호호. 제가 남자도 아닌데 뭐 그리 신경을? 


남자보다 선생님이 더 좋아요. 



환자들과 닭살 멘트가 오간다. 

짧은 순간이지만

살갑다.





나보다 젊은 그녀.

일반외래에서 만났다.

폐암을 진단받고 첫 항암치료 후 내원하셨다. 

처음부터 뇌전이가 동반되어 감마나이프 시술도 받으셨다. 

내일 모레 신경외과 진료가 있는데, 감마나이프 시술을 하고 먹었던 항전간제가 떨어졌다며 약을 타러 토요일 외래에 오셨다. 이틀 후면 신경외과에서 약을 처방받을 수 있는데 굳이 이틀치 약을...

뇌 MRI 에서 보니 병변도 아주 작아 감마나이프 합병증은 없을 것 같고, 이틀 정도 항전간제를 먹지 않는다고 해서 별일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의사인 나는 그렇게 판단하지만, 이제 막 치료를 시작한 그녀의 입장에서는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녀의 긴장이 느껴진다. 



토요일 외래라 외래 시간 운영에 여유가 있어 보였는지

처음 본 나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해도 되겠냐고 묻는다. 


제가 4기인가요?



뇌전이가 있어서 4기 인가요? 

4기면 심각한거 아닌가요?  


네. 

뇌 말고도 뼈에도 병이 있어요.

원래 암이 생긴 장기 이외의 다른 장기에서 병이 발견되며 전이가 된 것이고 그래서 4기가 되는 것이죠. 


그럼 제가 말기 암환자란 뜻인가요?


4기가 말기라는 뜻은 아니에요.

말기는 더 이상 치료적인 접근이 힘들 때, 

예를 들면 항암치료나 방사선치료 등으로 병을 좋아지게 하기 위한 대안이 더 이상 없을 때 통상적으로 말기라고 합니다. 환자분은 비록 4기로 진단받으셨지만 아직 컨디션이 좋고 이제 막 치료를 시작한 상태이니 말기라고 볼 수는 없는거 같아요. 


믿을 수가 없군요. 

저는 아무 증상도 없은데 4기 암환자라니. 

좋아질 수는 있는건가요?

항암제가 효과는 있나요?

제가 좋아질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나요?


...


...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제 막 시작한 항암치료가 환자분께 어떤 효과를 낼지 아직은 판단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일단 항암제 독성이 별로 심하게 나타나지 않은게 다행인거 같습니다. 

비록 4기라 하더라도 일상생활을 잘 하실 수 있는 만큼 컨디션이 좋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거 같아요.

우리 환자분은 잘 견디고 이겨내실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다. 



얼굴에서 빛이 나는거 같아요.

원래 피부가 좋으신가요? 

어쩜 항암치료를 했는데도 이리 피부가 좋고 얼굴에 생기가 있나요? 


오늘 쌩얼이에요.


비로소 그녀가 씩 웃는다. 


빛이 나는 얼굴이니

그만큼 결과가 좋을거 같아요.

사람은 통계로 사는게 아니라 자기 생명력으로 사는 거랍니다. 


울먹거리는 그녀. 


선생님, 감사합니다. 

열심히 치료할께요.



화장술로 감출 수 없는 혹은 화장한 얼굴보다 훨씬 아름다운,

빛이 나는 얼굴이 되도록 

나도 노력하자. 

빛이 나는 얼굴은

마음 내면으로부터

삶의 철학에서부터 우러러 나올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