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레지던트일기

1년차, 여름휴가 맞이하다

슬기엄마 2011. 2. 27. 22:20

1년차, 여름휴가 맞이하다

 

1. 휴가 초반 3~4일은 잠을 자도 계속 병원 꿈을 꾼다. 나의 malpractice로 인해 환자 상태가 악화되어 괴로워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2.
나 대신 병동을 지키며 everyday 당직을 서는 counter 1년차가 자꾸 전화를 해서 고요한 내 마음에 돌을 던진다
.

3.
휴가 5일째 저녁부터 병원에 돌아갈 생각을 하며 뭘 해도 마음이 편치 않아 결국 병원으로 복귀하기 위한 가방을 챙기고 나서야 안심하게 된다
.

4.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의 질서에 적응하지 못해 외출시 허둥대며 시간을 낭비한다. 바뀐 버스 노선표, 은행업무, 언제 분실했는지 모르는 운전면허증과 주민등록증의 재발급 등 잡무를 처리하는 나의 동선이 무질서하게 해체되고, 일 하나 처리하는 데 몇 번의 헛수고를 반복하며 세상을 원망한다
.

5.
가구 및 물품들이 재배치된 집안에서 물건 하나 제대로 찾지 못하고 남편, 딸아이, 친정어머니의 도움과 눈총을 받는다
.

6.
딸아이의 방학숙제를 돌봐주려 하지만, 이미 많은 것을 배운 아이는 내 도움을 별로 필요치 않고 오히려 귀찮아하여, 나는 엄마로서의 기능상실에 당황한다
.

이게 이번 여름휴가의 특징이었지만, 꿈같은 1주일간의 휴가를 보내고 나니 왠지 답답했던 가슴이 후련해지는 것 같다. 나는 평소 연휴가 생겨도 특별한 계획을 세워 화끈하게 놀만한 재능이 없는 관계로늘 일상을 유지하는 것이 미덕이라는 핑계를 대며 밋밋하게 지내는 편이라 특별히 여름휴가를 고대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여름은 예외였다. 2~3주 전부터는 어떤 고난과 고통도 이번 휴가를 버팀목삼아 버텨왔었다. 병원만 벗어나면 뭘 하든 나에게 보람찰 것만 같아, 계획이 없어도 좋았다
.

예전부터 읽어보리라 결심했던 책. <작은 변화를 위한 아름다운 선택>. 현재 하버드 의과대학과 아이티를 오가며 환자를 진료하는 내과의사이자 의료인류학자인 폴 파머의 삶을 조명한 책이다. 이 책을 읽은 것이 이번 휴가의 가장 큰 성과가 아니었을까? 굳이 주인공인 폴 파머와 나를 비교한다는지 그에 비추어 나는 어떤 지평에 서 있는지를 비교하는 유치한 짓은 하지 않았다고 변명한다. 그가 보여주는 실천적인 삶의 방식은 대단히 경탄할만하지만, 나에게 더 큰 반향을 울린 것은 그가 공부한 의료인류학이 그가 의사로서 살아가는 삶에 viewpoint를 제공하기에 충분하다는 점이었다
.

나는 최근 몇 개월 동안 내가 의료사회학을 공부했던 사람이라는 점을 잊은 채 살고 있었다. 병원이 내 생활의 모든 공간이었고 이 안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사건들이 내 사고를 지배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1년차에게 필수불가결한 통과의례라는 것은 알지만, 내 마음 씀씀이까지 땅콩만큼 작아져 사소한 일에 일희일비하는 소심함이 몸에 배어버린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이곳보다 훨씬 넓은 세상이, 각기 독특한 order가 작동되며 구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리기 때문에, 병원에서 일면적으로 발견되는 현실에 쉽게 부화뇌동하고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 심장만큼이나 콩닥콩닥 가슴졸이며 일상에서 발을 동동 굴렀던 것은 아닐까? 후회되지만 아마 시간을 되돌이킨다 하더라도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왜 내 일상의 일과 환자, 병원에서의 생활에서 좀더 적극적으로 생활하지 못하고 야심만만하게 미래를 꿈꾸지 못했을까 하는 점이다. 왜 그렇게 끌려다니기만 했을까
?

일주일간의 휴식이 생각보다 정신 건강에 큰 도움이 되었나보다. 조금 마음이 커진 것 같고 계속되는 call에도 짜증이 덜 난다. 내심좀 잘해보리라하는 욕심도 생긴다. 그동안은 이런 마음조차 꿈꿀 여유가 없었는데 말이다. 3인데 휴학하고 항암치료 중인 녀석에게 숙제로 내준 영문독해를 함께 풀고, 백혈병이 재발한 동생에게 조혈모세포를 기증하기 위해 입원한 언니 환자와 함께 잠시 묵상도 드리고, 한달 이상 중환자실에 입원하여 사선을 넘고 살아돌아온 젊은 총각의 사타구니를 들여다보며 상처에 granulation tissue가 많이 자라 정말 다행이라고 웃을 수 있으니, 여름 휴가 후 start는 썩 괜찮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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