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종양내과의사의 두 얼굴

슬기엄마 2013. 10. 21. 20:27


항암치료를 받으러 외래에 오면

환자는 일단 피 검사부터 합니다. 

그날 피검사 결과에 따라 항암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몸상태인지 아닌지 확인해야 하니까요.

피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한 시간 이상 외래 대기실에서 기다립니다.

자기가 예약한 시간이 넘어도 앞 환자들 진료에 밀려 내 진료 시간은 지연되기 일수 입니다. 

그 전에 CT라도 찍었다 치면

그 결과를 기다리는 마음에 초조함이 더해집니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잔뜩 긴장해서 

1분 1초가 영겁처럼 느껴집니다.

그렇게 애타는 마음으로 두어시간 진료를 기다리다가

겨우 주치의를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들어간 진료실, 

의사는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컴퓨터 화면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내 인사에 답을 하는 둥 마는 둥 의사는 화면만 뚫어져라 쳐다봅니다. 


그게 저의 모습입니다. 


바로 앞의 환자가 펑펑 울고 나갔습니다.

검사 결과가 좋지 않고

몸도 많이 약해져서  

제가 당분간 항암치료는 그만 하고 일단 좀 쉬자고 했습니다. 

환자는 이해할 수 없다고 했고 나는 억지로 짧은 시간에 이해를 시켜야만 했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이해하겠는데 

그녀에게 내 마음을 이해시킬 수가 없습니다.

좋은 말로 인사하고 헤어지지 못했습니다. 

내 마음은 잔뜩 굳어져 있습니다. 


그렇게 환자가 나가고 들어오는 동안

막 나간 앞 환자 의무기록을 정리하고 

환자 명단을 다시 띄워서 

이번에 진료할 환자의 피 검사 결과 화면 띄우고

CT 사진 화면 띄우고

환자의 의무기록 화면을 띄웁니다. 

그렇게 여러개의 화면을 띄우는 동안 컴퓨터는 버벅버벅 한 개씩 화면을 보여줍니다. 

어제 리뷰할 때까지 판독이 안 나왔으면 그 자리에서 공식 판독결과를 확인하기도 하고

환자의 피검사 결과가 어떤지도 확인하고

걸어들어오는 환자의 품새를 보고 환자 컨디션을 짐작하고

지난번 외래 때 환자가 무슨 얘기를 했었는지, 뭘 궁금해 했었는지 메모도 확인하고

그러느라 

정작 내 앞에 자리잡고 앉은 환자의 얼굴조차 제대로 쳐다보지 않습니다. 


그게 저의 모습니다. 


다행히 

이번 환자의 검사 결과는 좋습니다.

이번에 바꾼 약이 효과가 좋은 것 같습니다.

좋은 결과를 보니 나도 마음이 가볍습니다.

그동안 그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알기 때문에 한껏 그를 격려해 줍니다. 

긴장하며 굳어져 있던 그의 얼굴도 비로소 환하게 펴집니다. 

나도 그제서야 겨우 빈곤한 미소를 보입니다. 


그 다음 환자는 상황이 또 다릅니다.


그리고 

그 다음 환자는 상황이 또 다릅니다. 


수분 밖에 안되는 짧은 시간을 단위로 내 얼굴도 굳어졌다 풀어졌다를 반복합니다.

점심 먹을 시간도 없이 하루 종일 백명에 가까운 환자들을 보면서 오후 서너시가 넘어가면

내 얼굴은 완전히 굳어버립니다.

근육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대화가 필요한 환자, 오래 토론해야 할 것 같은 환자들은 진료시간의 뒷쪽으로 배당합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갈수록 진이 빠집니다. 

대화가 많이 필요하다는 것은 그만큼 환자에게 풀어야 할 과제가 많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종양내과 의사의 얼굴은 무표정한 것이 더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호불호를 얼굴에 드러나지 않게 관리하는 것이

일관성이 있고

환자들에게 심리적으로 나쁜 영향을 덜 미친다고 합니다.

한번 좋다고 같이 좋아하고

한번 나쁘면 같이 침울해 하는 모습을 노출하는 것이

환자의 정서에 더 좋지 않다고 하네요. 

일관된 모습으로 환자를 대할 줄 아는 것이 종양내과 의사가 가져야 할 미덕이라고 합니다.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저도 아직 사람인지라

그런 표정관리를 잘 못하고 내 마음을 얼굴에 다 드러냅니다. 


의사의 사소한 몸짓 하나, 사소한 말 한마디도

환자들에게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는 아직 아마추어 의사인것 같습니다. 


환자의 입장에서

충분히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어설픈 설명을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의학적으로 어려워서 의사들끼리도 난관에 부딫히는 사항들이 많습니다. 

어찌보면

의사의 설명을 듣고 다 이해하는 것 보다

그냥 의사를 믿는 것이 더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의사에게 믿음을 갖게 하는게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병의 시작부터 저랑 인연을 맺고 서로의 입장을 잘 이해하는 환자도 있지만

그런 라포를 채 형성하지 못한 채 급박한 상황을 맞이하여 내 말을 내 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환자도 있습니다. 저도 환자와 가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도 있구요. 


오늘 제 진료실에서

큰 슬픔과 분노를 안고 나가신 분이 계십니다. 

저는 아직 훈련과 수양이 더 많이 필요한 의사인것 같습니다. 

아직 그런 수준인 것 같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든 풀어야 

다음 환자를 편안한 마음으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