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전이성유방암

남편도 힘든데...

슬기엄마 2013. 9. 7. 15:16


항암치료를 시작한 환자. 

아드리아마이신은 투약 후 2주가 지나면

머리카락이 숭숭 빠지기 시작한다.

뭉텅뭉텅 빠지는 머리카락을 보며 

처음에는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지만

2-3일 지나면 너무 머리카락이 많이 빠져서 온 집안에 머리카락이 흩날리니 그거 청소하기도 귀찮고 

머리카락이 빠지면서 두피가 아프기 때문에 두통도 생기고

이래저래 성가시다. 

그래서 환자들은 머리를 다 밀어버린다. 

그렇게 머리를 밀고 나면 환자들이 용감해진다. 

그리고 나면 환자들이 잘 울지 않는다. 

나는 이런 일을 겪으며 

환자가 본격적으로 자기 치료의 주체가 되고 씩씩하게 치료받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한다.



1주기 치료를 마치고 2주기 치료를 하러 올 때 

머리를 밀고 두건이나 가발을 쓰고 온 환자 옆에

같이 머리를 밀고 온 남편들이 앉아 있을 때가 있다. 

환자는 외출할 때 두건이나 가발을 쓰지만

집에서는 답답하기 때문에 대개 민둥머리로 지낸다.

그런 민둥머리 부인이 자신을 민망스러워 할까봐 남편이 같이 머리를 밀어주는 것이다.

백혈명으로 치료받는 친구를 위해 같은 반 친구들이 머리를 같이 밀어버린 감동 뉴스를 봤던 기억이 난다. 


씩씩하게 머리를 밀었지만, 마음 속 깊이 속상한 마음이 있는 부인을 위해, 

겉으론 쿨하게 치료 잘 받고 자기 생활도 잘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쉽게 마음에 멍이 드는 부인을 위해,

남편이 같이 머리를 밀어준 것이다. 


나는 진료실에 함께 온 남편을 만나면 

힘들게 치료받는 부인을 위해 

항암치료 중에, 혹은 항암치료가 끝난 다음에라도 

계속 잘 대해주고

부인을 격려해주고

집안일도 도맡아서 좀 해 달라고 부탁을 한다. 

환자들은 정작 항암치료가 끝나고 나면 더 힘들어 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치료가 끝나고 난 후 최소한 몇개월은 더 잘 해달라고 부탁한다.

환자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 남편도 힘들다. 

집안일 돌아가는게 예전같지 않고

부인 성격도 점점 예민해지는 것 같다. 

항암제든 호르몬제든 기본적으로 여성 호르몬을 억제하는 것이 치료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부인은 폐경기 증상으로 인해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힘들어한다. 

항암치료가 끝나면 모든 고생이 다 끝나고 일상이 제자리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엉망이 되는것 같다. 

부부관계도 갖지 못하고 수개월 수년이 지나기도 한다. 

부인의 정서적인 서포트도 없다.  

직장 생활도 점점 힘들어지고

나 자신도 나이를 먹어가니 직장 내에서 점점 경쟁력도 떨어지는것 같아 

나날이 스트레스가 늘어가는 판국에 나를 이해해주고 도와주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나와는 상관없이 훌쩍 커버린 자식들.

치료는 끝난 것 같은데 도통 정상 생활로 돌아오지 못하는 아내.

그래서 남편도 몸과 마음이 소진된다. 

불만도 많아진다. 



늘 환자 편을 드는 나에게

한 (남자)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남편 입장이 되어 보라고...

남자도 힘들다고...

그걸 이해해 줘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전이성 유방암 환자 중에는

지금 받고 있는 치료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그냥 지금이 안정적이라 다행이라는, 

그렇게 벼랑 끝에 서 있는 심정인데도 

그 와중에 남편이 부부관계를 너무 자주 요구하여 힘들다고 호소하는 환자도 있다. 

항암치료 기간 중에 부부관계를 해서는 안되는 기간은 언제인지 묻기도 한다.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데도 이렇게 계속 부부관계를 해도 되는지 묻는 환자도 있다. 

환자 병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알고 있는 나로서는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지금 그녀의 몸 상태를 생각하면 힘들텐데... 싶은 그런 환자들이 있다.


그들은 

언제까지 계속 남편의 요구를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고 말한다.

남편도 성적 욕구가 있는데

자기 때문에 그걸 참으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런 요인이 문제가 되어 남편이 바람을 피우거나 이혼을 하는 경우도 많다. 

유방암은 전이되고 재발되어도 비교적 오랜 기간 동안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병이다. 그래서 이런 성 문제를 뒤로 미뤄둘 수 만은 없다. 전이성 유방암으로 치료를 시작할 때에는 부부 면담을 해야 할 판이다. 



어제는 한 환자가 울고 갔다.

추석 잘 지내시고 다음달에 보자는 나의 인사를 듣더니 

나가지 않고 자리에 털석 앉는다. 

전이가 되었는데

비교적 전이 정도가 심하지 않아

일상생활을 잘 하시는 분이다.

약제를 두번 정도 바꿨지만

나빠지는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다. 그냥 저냥 잘 지내시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제는 

내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한끼도 안 빠뜨지고 남편 밥상 차려줘야 하고 

자기가 아니면 밥 못 챙겨 먹는 남편 때문에 어디 여행 한번 다녀올 수도 없고 

명절, 집안 제사 다 챙기고

김장도 다 하고 

죽을 때까지 그냥 이렇게 남편, 가족들 뒷수발만 들고 살아야 하는 거냐고 한바탕 울고 가셨다.   

명절을 앞두고 그런 생각이 더 든다고 한다. 

자기는 그렇게 최선을 다 한다고 했는데, 요즘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것 같다고 하였다. 

남편이 바람 피우는 것도 다 자기탓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어디 자기 억울함을 호소할 곳도 없다고 한다. 

그녀에게 

지금 그녀의 상황을 이해해 줄 수 있는 건 나뿐이었나 보다. 


한국 유방암 환자의 평균 연령이 서양보다 15년 이상 낮기 때문에

이런 부부관계의 문제, 가족관계의 문제가 서양보다 훨씬 심각하게 대두되는 것 같다. 


흔히 어떤 병의 예후를 결정하는 요인들 가운데

환자에게 가족이나 배우자의 존재 여부, 그들이 얼마나 supportive 한가에 따라 예후가 달라진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단순히 존재하기만 하는 가족, 배우자는 더 어렵고 

서로에게 마음의 짐이 될 수도 있다.


우리 환자가 씩씩하게 병을 잘 이겨내고 치료받으려면

가족과 배우자들도 함께 치료과정에 동참하여 

그 가족의 질서 내에서 

서로를 잘 이해해 주고 

그들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실천, 확인하는 계기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울고 나가는 그녀에게 

'힘내세요'

그렇게 말하는 것은

별로 도움이 안됬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