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주치의 변경을 앞두고

슬기엄마 2013. 9. 6. 19:16


지난 2년간 미국으로 연수를 가셨던 손주혁 선생님이 돌아오셨습니다.


당시 혼자 유방암 진료를 하시던 손 선생님께서 연수가기 6개월 전부터 

막 임용된 저에게 조금씩 환자를 인계해 주셨습니다. 

저희 병원은 조기 유방암 환자는 외과에서 추적관찰을 하기 때문에 

제가 인계를 받아 진료를 계속 해야 했던 손 선생님 환자들은 모두 전이성 유방암 환자들이었습니다.


나름으로 애써서 진료했지만 돌아가신 분들도 있고 

2년전 손주혁 선생님이 정한 치료방법을 변경하지 않은 채 지금까지 안정적으로 잘 계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손주혁 선생님은 이런 분들을 다시 만나게 되면 정말 반가와 하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유가 어찌 되었건 환자들은 주치의가 바뀌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정이 든 것도 있고

지난 2년 이상의 시간동안 자기에게 있었던 이벤트를 다 알고 있는 제가 

계속 진료하기를 바라시지만 

지금처럼 유방암 진료가 저 한명에게 몰려 있다보면

종일 진료를 하는 월요일 수요일이면 늘 100명이 넘는 진료를 해야 합니다. 

힘들게 치료받는 환자들 손 한번 잡아주고

속상해서 눈물 흘릴 때 마음 한번 도닥여줄 시간도 없이

항암제를 정해서 치료받으시라고 결정하여

등떠밀어 진료실에서 내보내야 하는 지금의 현실을 

계속 유지할 수는 없는 노릇인것 같습니다. 

진료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환자 진료수가 적정하게 배분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정작 진료시간에

이제 손 선생님이 연수에서 돌아오셨으니 그 쪽으로 예약을 해드리겠다는 설명도 제대로 못한 채 환자 예약을 변경하고 있습니다.


제일 오래본 환자들이니 

저도 그만큼 정이 들고

서로에게 익숙해져서 편하고 좋은데

저도 이런 헤어짐이 아쉽습니다.


진찰한 환자가 나가고 다음 환자가 들어오는 그 사이에

저는 맹렬히 차트를 정리하고 처방을 내는데

그렇게 하다보면 

들어와서 자리에 앉는 환자와 눈을 맞추고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은채 진료를 시작합니다.

자리에 앉은 환자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기다려주십니다.

아주 예의없는 행동이죠.


그렇지만

지난 2년 이상 나와 함께 치료했던 환자들은

그런 나의 상황을 다 이해해주고

내가 환자들에게 겉으론 싹싹하게 굴지 않아도

많이 고민하면서 치료방침을 정하고 부족한 수준에서나마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제가 기대한 이상으로 많이 참아주시고 이해해 주셨습니다.  

수십명 이상 짧은 시간 내에 

대량으로 항암제 처방을 내다보면

한두가지 약들의 처방에서 실수가 있습니다. 

환자는 돈을 내고 처방전을 받아보고서 그 사실을 압니다.

조용히 외래 방으로 돌아오셔서 담당 간호사를 통해 처방 오류를 지적하시면

제가 처방을 다시 합니다.

그러면 환자들은 다시 돈을 내고 처방전을 새로 받습니다.

그렇게 귀찮은 일을 당하면서도 참아 주셨습니다. 늘 죄송한 마음입니다.


그런 환자들 중에

블로그에 들어오시는 분들이 꽤 계신데요

언제든 안부 전해주세요.

간혹 손 선생님께 못 여쭙고 궁금한 사항들이 있으면 비밀댓글로 질문 남겨주세요. 제가 성의껏, 필요하면 손 선생님과 상의하여 답을 드리겠습니다. 언제든지 제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저를 불러주세요. 


여름이면 손으로 만든 부채를

가을이면 손수 쪄 가지고 온 고구마를

심지어 기차타고 오면서 먹고 남은 옥수수를

항암치료 이겨낼려고 배운 뜨게질 솜씨를 이용해 만든 인형을

문방구 좋아하는 나를 위해 예쁜 수첩을

그런 소소한 선물로 당신 마음을 나에게 주신 환자들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어쩌면 여자끼리라 더 부담없이, 

격의없이 지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에게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가르침을 주신 환자들도 많았습니다. 


제가 이만큼의 의사 노릇을 하게 된건 다 여러분들 덕분입니다. 

뜨거운 마음과 사랑을 많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손 선생님께로 진료를 받게 될 환자분들 모두가 

지금처럼 건강하게 계속 잘 치료 받으시길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