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인턴일기

아줌마 인턴의 오프

슬기엄마 2011. 2. 27. 21:38

아줌마 인턴의 오프

 

내 오프는 초등학교 1학년인 딸 슬기가 더 챙긴다. 이 녀석은 내가 거의 1년 내내 every other day로 당직을 선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듯엄마, * *일날 무슨 일이 있는데 그날 엄마 오프지? 꼭 같이 하기다, 약속!” 이런 식으로 운을 뗀다. 아이의 달력에는 내 오프가 빨간 동그라미로 표시되어 있다. 오프라고 해도 주말 오프가 아닌 이상 귀가 시간은 저녁 8시 이후다. 허겁지겁 늦은 저녁을 먹고 나면 온몸이 노곤해서 씻는 것도 귀찮지만, 모녀 관계가 삭막해지지 않으려면, 슬기 일기 쓰는 것도 봐 주고 숙제도 챙겨주고 같이 목욕이라도 해야 한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요즘은 누구랑 친하게 지내는지, 요즘 관심거리는 무엇인지 등 엄마가 챙겨야 할 일은 많다. 둔감한 엄마가 되어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줄까봐, 집에 도착하면 병원 일을 완전히 접어두고 아이와 많이 이야기를 나누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려고노력한다’(그러다 보니 남편은 뒷전이 되는 게 사실이다. 미안해요, 슬기아빠).

그러나!!! 마음 한구석은 늘 불안하다. 내가 인수인계는 제대로 다 해주고 온 것인지, 할 일은 다 하고 온 것인지, 내일 할 일 중에 준비가 빠진 것은 없는지…. 더욱이 요즘처럼 전공의 시험을 앞두고 있을 때면 집에서라도 공부를 좀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마음이 편하지 않다. 이 시간에 책을 펴고 공부하는 젊은 동료들에게 아줌마 인턴인 내가 뒤쳐질 수밖에 없는 건 아닐까? 경쟁력을 갖춘 의사가 되기 위해서 나는 좀더 부지런해져야 하는 게 아닐까? , 병원과 집만 아는 협소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신문도 보고 다양한 읽을거리도 접하는 시간이 필요할 텐데, 나는 왜 이렇게 집에만 오면 느슨해질까? 나와 수많은 과거를 공유했던 예전의 친구들과 연락 한번 못하고 지낸 지 너무 오래됐다. 집안 일도, 병원 일도, 사람 관계도, 나 스스로를 위해 투자하는 시간도, 그 무엇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무능력한 사람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

사실 나는 친정 어머니께서 슬기를 돌봐주시고 일상 생활의 많은 부담도 대신 지고 계신다. 남편도 홀아비 신세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단 한번의 잔소리 없이 나를 응원해주고 있다. 아마도 나만큼 좋은 조건에서 의대공부를 하고 인턴 생활을 하는 아줌마 인턴은 없을 듯하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아이가 있는 여자 의사들의 생활은 팍팍하다. 병원에서는 같은 실수라도아줌마라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신경이 곤두서고, 집에서는 부족한 아내,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 늘 몸과 마음이 다급하다. 여기에 경제적인 문제나 다른 집안 문제라도 겹치게 되면 마음 깊이 외로운 비명을 질러댈 수밖에 없다
.

병원에서는 똑똑하고 일 잘하고 cool한 의사로, 집에서는 어디 새는 곳은 없는지 집안일 단속 잘하는 엄마로 살아가기 위해 정작 나는 마음을 독하디 독하게 먹어야 한다
.

올 한해 여전공의의 출산휴가를 3개월로 하는 대신 수련기간을 연장하는 것과 관련된 논의가 분분했다. 예전에는 한 달 쉬는 것도 눈치를 보아가며 불편하고 미안한 마음이었던 것에 비하면 세월 많이 좋아졌다는 이야기도 한다. 아마도 여성의 출산과 양육, 가사의 분담에 대한 사회 전체적인 인식과 문화가 서서히 변화하기 전까지 여의사들이 짊어지고 가야 할 부담은 여전하지 않을까 싶다. 그날이 올 때까지 멋진 여의사 선생님들 모두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