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펠로우일기

가정의 달, 가족을 생각하다

슬기엄마 2011. 2. 27. 11:32

가정의 달, 가족을 생각하다

 

중학생이 된 슬기, 이제 어린이날 선물을 안 챙겨 줘도 되는 청소년이 되었다. ‘쿨하다는 말을 좋아하는 슬기는 나에게도 상당히 해서 나를 괴롭히는 일도 없고 특별히 엄마에게 요구하는 것도 없으며 나의 비가정적 생활에 대해서도 이해를 잘 해주는 편이다. ‘자기주도적 학습을 강조하는 아빠랑 상의해서 학교 공부는 해결하고 있는 것 같다. 슬기가 요즘 학교에서 뭘 배우는지, 학원도 안 다니는데 공부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문제집은 샀는지 난 그런 소소한 사항들은 잘 모른다. 늦게 퇴근했는데 슬기가 아직 안자고 깨어있으면 시간가는지 모르고 수다를 떨고, 수준이 격상된 슬기의 농담에 감동받아 웃다가 괜히 애를 늦게 재우는 나쁜 엄마이다.

 

슬기와 슬기 아빠는 성격적, 정서적으로 매우 유사한데 그들을 보면 유전자가 무섭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둘 다 논리적이고 문제해결형이라 세상일에 대해, 친구에 대해, 가정일에 대해서 얘기할 때도 쓸데없는 감정소모를 하지 않는 것 같다. 뭘 해도 계획을 잘 세우고 점검하면서 좋은 성과를 낸다. 내게 아내의 기능과 역할을 요구해봤자 별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간파한 슬기아빠는 알아서 잘 드시고 잘 주무시고 슬기랑 공부하고 내가 처리하지 못하는 가정 잡무들을 일말의 불평없이 잘 처리해주신다. 내가 인터넷 서점에 읽고 싶은 책을 저장해놓으면 할인혜택이 많은 날을 알뜰히 챙겨 카드로 결제해 주시고 아직도 다 못갚은 학자금 융자금을 연체되지 않게 챙겨서 입금해주신다.

 

무엇보다도 이런 생활이 유지될 수 있게 엄마가 이 늙은 딸을 뒷바라지하고 계시는데, 애프터서비스기간이 무한정 길어지는 것에 대해 점점 힘들어하신다. 부양을 제대로 받아도 시원치 않을 판에 딸, 사위, 손녀의 정신적, 육체적 양육을 맡아하시느라 엄마가 도리어 지쳐가는 것이 느껴진다. 슬기 중학교 엄마들과 연락하여 요즘 학교에서는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행사가 있는지, 어느 학원이 좋다고 소문났는지, 미리미리 준비해야 하는 수행평가는 어떤 항목인지, 최신 정보를 모조리 파악하고 계신다. 그런 엄마도 요즘 들어 힘이 많이 드신지 어느 저녁날이면 술 한잔을 하시고 수현아, 이렇게 사는게 최선이 아닌 것 같다며 내 마음을 떨게 하는 공포의 문자 메시지를 날리신다.

 

내가 병원 생활을 잘 할 수 있게 가족들이 보여주는 눈물겨운 성원에도 불구하고, 난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 진정 감사하고 노력하지 못하는 것 같다. 가족이 나를 챙겨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가족을 위해, 가정을 위해 내가 기여하고 노력해야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둔감해진다. 병원에서 일어하는 소소한 작은 일에 분노하고 감정을 콘트롤하지 못한 채 나를 못 이기고 씩씩거리는 동안, 가족들과 대화하고 좋은 시간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것에는 게으르다. 병원에서 환자에게 마음쓰고 친절하게 얘기하느라 내 에너지를 다 빼앗긴 것일까? 집에서의 나는 가족에게 예의도 없고 매너도 없다. 내가 처한 억울한 상황, 나를 화나게 하는 세상일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부가적으로 설명을 해야 하는 일들이 조금씩 쌓여가고, 별로 유쾌하지도 않은 그런 일을 집에서까지 얘기하고 싶지 않아 점점 말을 안하게 된다.

가족과는 좀더 색다른 얘기를 하고 병원에서의 일과 감정을 벗어버리고 즐겁게 지내고 싶다. 그렇지만 내 마음이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내 얼굴에, 표정에 그런 나의 감정이 묻어나나 보다. 얼마전 슬기가 이런 말을 했다. ‘엄마는 왜 사람의 목숨과 관련되는 심각한 과를 선택해서 힘들어하는지 모르겠어. 개업도 할 수 없는 과니까, 맘에 안든다고 병원을 나올 수도 없잖아.’ ‘수학을 좋아한다고 수학만 공부하며 먹고 살기는 힘든 시대야. 엄마는 환자 보는게 좋은데 환자보면서 먹고 살수 있으니까 좋은거야.’ ‘나도 같이 지내는 친구들이랑 다 마음이 잘 통하는 건 아니야. 힘든 면이 있지. 그래도 어쩌겠어. 맞춰가면서 살아야지.’ 조금 더 쿨하신 슬기 아빠, 나의 상황에 대한 정서적 공감을 표해 주기보다는 병원이라는데가 원래 좀 그래. 너 마인드 콘크롤을 좀 해야겠다며 한마디 던지고는 코를 골고 쿨쿨 주무신다. 이렇게 쿨한 부녀를 봤나!

 

예전에 나는 집에서 수다가 참 많았고 밤에도 수다떠느라 잠을 설칠 정도로 대화가 많았는데, 점점 수다를 잘 안떨게 된다. 대화를 하기 보다는 피곤에 지친 나를 그대로 노출하고 집에 오면 쓰러지듯 잠을 자는 일이 잦아지는 것 같다. 집에 오면 입을 닫고 아무 말도 하기 싫어지는 기분이다. 마치 TV 드라마에서 흔히 보듯, 회사일에 지친 남편이 집에 돌아오면 집안일에도 비협조적이고 자기 힘든 거 다 짜증내는 거, 내가 그런 남편 같은 존재가 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스위트 홈이라는 행복한 이미지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관계만이 꽃피우는 것이 가족이 아니니까. 그래도 몸이 힘들고 영혼이 지쳤을 때 나를 온전히 쉴 수 있는 곳은 가족이다. 나를 제외한 우리 가족들은 열심히 노력하며 살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정신을 차려야겠구나!

어제 시험이 끝난 슬기는 친구들과 돈을 모아 과일주스를 사서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을 찾아뵈었다고 한다. 선생님은 중학교 교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중간고사가 끝났다며 찾아온 어린 제자들이 얼마나 기특했을까? 여러 모로 슬기는 나에게 교훈을 준다. 가족과 스승을 기리라고 되어있는 5, 너무 부담스러워하지만 말고 순수하게 감사함을 표출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겠다. 세상일에 지칠 때 가끔은 멈추어 숨을 골라야 하는 순간이 있고, 그렇게 숨고르기를 하는 동안, 나를 키워주신 부모님, 가족,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순수한 마음을 되찾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