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펠로우일기

아직도 의사와 환자 사이의 거리는 멀다

슬기엄마 2011. 2. 27. 11:27

아직도 의사와 환자 사이의 거리는 멀다

 

의사가 되어 좋은 것 중 하나는 오랫동안 연락없이 지내던 지인들이 무슨 일이 생기면 먼저 연락을 해 온다는 것이다. 그 지인이라는 분이 나랑 별로 친하지 않거나 내가 불편해하던 사람이라면 얘기가 다르지만, 대개의 지인들은 연락없이 지내다가 자기가 아쉬울 때 전화를 한다는 생각에 매우 미안해 하며 전화를 할 정도의 예의가 있는 사람들이라 나로서는 반가운 마음이 먼저다. 내가 먼저 인사를 드리고 지냈어야 하는 분들도 있는데, 오히려 그분들이 나에게 미안해하니 나로서는 잠자코 있기만 하면 예의를 갖추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분들의 도움 요청에 내가 별 도움이 안될 때,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일 때, 나도 많은 사람의 손을 거치고 거쳐야 할 때는 대략 난감이지만, 암 관련된 정보나 치료 중 어려움을 겪으며 나에게 전화를 할 때는 비교적 수월하고 양질의 정보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나로서는 성의를 다해 응할 수 있는 항목이다.

 

사회학과 대학원을 마친지 10년이 넘어서 아주 가끔씩 우연한 기회에 선후배들을 만나게 되는데, 엊그제 몇 년만에 한 선배로부터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급하지 않으니 메일 주소를 알려달라는 어조가 사실은 급한 일이 있는데 전화나 문자로 하기는 어려우니 메일로 사연을 보내려고 하는구나 알아챌 수 있었다. 통화를 하며 얘기를 듣고 요점을 간추려 보니, 가족의 병과 치료에 관해 뭔가 검사도 많이 진행되고 환자도 예전과 달리 힘들어 하는데 담당 의사로부터 환자의 병의 진행 정도나 회복여부에 대해 확실한 이야기를 듣지 못해 마음이 아주 답답하신 상태였다. 그러면서 본인이 기록해 온 자세한 병력기록과 특정 사건이 있을 때 의사와의 면담상황, 당시 시행한 영상 및 혈액검사 결과를 일일히 기술하고 스캔으로 결과지를 첨부파일로 만들어 나에게 메일로 보내셨다. 나는 그 꼼꼼한 기록들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오랜 투병에도 가족으로서 성심성의껏 수발을 해 오셨구나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정확한 의학 용어는 아니어도 보호자로서 비교적 정확히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고 있었고, 그 정도면 내가 추가적인 설명을 할만한 일이 없을성 싶게 잘 알고 계신 것 같았다.

 

주위의 아는 의사들이 범하기 쉬운 실수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과거력과 현재의 상태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주위의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의사가 아니고 병원에서 환자진료를 담당하고 있는 담당의이다. 그 누구도 환자를 그 의사만큼 고민하지 못하고 장기적인 관점으로 치료를 계획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답답한 마음에 환자나 가족들이 몇가지 제한된 의무기록을 가지고 가서 안면이 있는 주위의 아는 의사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은 사공이 많은 배가 산으로 가듯, 오히려 무책임하게 한두마디를 던짐으로써 환자 진료에 장애가 되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

환자가 호소하는 바를 듣고 그에 입각해 환자를 직접 진찰하면서 환자의 전신적인 상태에 대한 판단을 해야 한다. 아무리 객관적인 검사수치가 있고 영상검사가 이미지로 재현될 수 있다 하더라도, 증상을 호소하는 당시의 환자를 진찰하지 않으면 정확한 진단과 판단이 어렵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주위 의사가 많으면 환자와 가족들은 그들로부터 들은 무수한 정보들 속에서 정작 자신의 담당의사의 말에 쉽게 신뢰를 보내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특히 담당의사가 사회성이 떨어져 의사-환자관계가 별로 좋지 않고 rapport를 쌓지 못했던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난 난감했다. 환자의 병력도 길고, 그 환자를 담당하고 있는 의사는 의료계/의학계에서 나보다 훨씬 명망있는 분이시며 진료 경험이 많으신 분이기 때문에 쉽사리 코멘트를 하는 것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설쳐대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선배님께서 어떤 질문을 하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하고, 다른 질문을 해도 역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는 선문답을 반복 하다보니, 도대체 내가 전화로 확답을 해줄수 있는 것도 없고 보호자로서 선배님이 답답해 하는 것에 전혀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못한 채 환자와 가족을 더 혼란스럽게 하는게 아닌가 우려가 되었다. 지금 병원에 입원해 계시는 상태라 하니, 가서 환자를 직접 보고 사진도 보고 신체 검진도 해 봐야겠다 싶어서 환자를 보러 가기로 했다. 병원에 가서 내 신분을 밝히고 담당 간호사에게 최근 변화된 약 처방이 뭐가 있는지, 환자의 신체 활력 징후의 변화는 어떤지, 의료진에서는 환자 상태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다행히 담당 간호사는 의무기록 열람의 주의사항을 들먹이며 쌀쌀맞게 굴지 않고 환자 간호상태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주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내가 보기에 담당 선생님은 환자의 상태에 대해 충분히 많은 고민을 하셨고 적절한 판단하에 치료를 진행해 오신 것 같았으나, 최근 들어 환자의 전신상태가 급격히 나빠지면서 치료를 끌고 가기 어려울 정도의 체력이 된 것이 문제였고, 이러한 급격한 변화에는 명증하지 않은 감염이 선행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었다. 광범위 항생제를 투여하면서 환자의 피검사 수치들이 조금씩 호전되고 있었고 증상을 조절할만한 약과 진통제 등이 2-3일전부터 새롭게 추가되어 투여되면서  회복 추세를 보이는 단계로 생각되었다.

같은 의사니까 그 의사편 드는거 아니냐고 반문하실까봐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이기 위해 애쓰면서 현재의 치료를 유지하면서 담당 의사선생님을 믿고 치료를 유지하시면 좋아질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환자 본인과 가족들은 나의 구구절절한 설명에 충분히 동의하시면서 그제서야 마음이 좀 풀린게 아닌가 싶다. 결론적으로 보면 치료는 제대로 되고 있었지만, 그 과정이 환자와 충분히 공유되지 않아 몸 못지 않게 마음 고생도 심하셨던게 아니었나 짐작해 본다.

 

의사소통은 점점 어려워진다

환자나 가족들과 소통을 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은 의사들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인 탓도 있겠지만 소통을 하기에 의학적 지식 자체의 어려움과 각종 검사, 병의 특성, 치료의 다양함 등이 점점 복잡하게 발전하고 있기 때문인 탓도 있다. 제대로 설명하려면 나도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하고, 이를 환자의 언어로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하는데, 지식 자체의 어려움으로 인해, 잘못했다간 설명의 늪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한 채고 환자들에게 말꼬리가 잡혀 헤매기 십상이다. 특정 환자에게 설명하느라 과도하게 시간을 쓰면 어쩌면 이는 다른 환자에게 손해가 될 수도 있으니 균형잡힌 진료, ‘한 진료를 하기 위해 평정심을 가질 필요가 있겠다. 모든 환자에게 매일 집중적인 설명을 하기 어려우니, 처음 진단을 받았을 때, 중간에 병의 코스가 변했을 때, 환자에게 나쁜 예후가 예상될 때 등 뭔가 결정적인 계기가 있을 때는 시간을 투자하여 상세한 설명을 하는 것이 필요하고, 특별한 변화가 없을 땐 간략하게 설명하고 넘어가는 정도의 시간배치를 하지 못하면 나를 위한 시간을 확보하기 어려울 것이다. 환자나 가족의 입장에서는 인터넷을 통해 뭔가 불확실한 정보를 더 많이 접하게 되니 의사의 설명을 통해 자신의 불완전한 지식을 완성시키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당연지사이겠으나, 그로 인해 환자 진료에 반드시 필수적인 내용이 아닌 것들을 설명하느라 시간이 쓸데없이 소모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아무리 상황이 복잡하고 의사들 일하는게 어려워진 시대가 되었다 하더라도, 의사와 환자의 거리는 지금보다 좀더 가까워질 필요가 있다는 대명제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의사가 자신의 진료원칙에 대해 환자의 언어로 조금만 더 설명을 했더라면, 환자에게 병을 이겨낼 용기와 격려를 조금만 더해 주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아무리 인터넷에서 최신의 정보를 뽑아 낸다 하더라도 환자는 아직 눈앞의 의사가 제일 중요하고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울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은 아직 유효한 것 같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