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2009 내가 쓴 책

수현 12. 죽음

슬기엄마 2011. 2. 27. 11:04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는데, 올해 들어 가끔 내가 암을 진단받는 꿈을 꾼다. 수술을 할 수 없는 4기 암으로. 왼쪽 쇄골하 림프절 검사에서 양성이 나온 위암으로 수술의 의미가 없는 경우, 직장암으로 당장의 수술하기에는 주위 림프절이 많아 일단 수술전 항암치료를 먼저 해보고 반응을 평가하기로 한 경우, 두세번 정도 더 있었는데 무슨 종류의 암이었는지는 기억이 잘 안난다. 꿈의 패턴이 거의 비슷해서 기억나는 건, 아프게 조직검사를 한 다음, 결과가 양성인지 아닌지, 수술을 할 수 있는 단계인지 아닌지 너무너무 조바심내며 결과를 기다리다가, 결국 양상으로 판정되어 항암치료를 시작하는 것으로 일단락이 난다. 내가 평소에 환자에게 여러번 설명했던 항암제를 맞기 전, 꿈속에서도 너무 두렵고 남들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이를 악 물고 참은 탓에 깨어나면 진짜 턱 관절이 아플 정도였다. 슬기가 걱정되고, 내 인생이 억울해서 속으로 겉으로 많이 운 탓인지 눈두덩이도 아프고 가슴속이 먹먹해질 정도라, 깨어나면 가슴이 아픈걸 물을 마시며 달래야했다.

사실 그런 꿈을 꾸기 전날, 환자 진료를 하다가 환자 상태가 너무 나쁘게 발견된다거나 환자가 너무 젊을 때, 환자가 증상도 없이 건강검진 하다가 뇌까지 전이가 된 상태에서 발견되었을 때, 나도 속상해서 어쩔 줄 몰라하던 감정들이 남아있다가 꿈으로 나타난게 아닌가 싶다. 그런 꿈을 꾸고 난 다음날은 환자들을 대하기가 좀더 조심스럽다. 아직도 그들은 힘든 마음으로 고생하고 있을테니 내가 상처를 덧내는 말을 하지 말아야겠다 싶어서.

 

할머니 할아버지 환자들은 사실 마음이 그리 힘들지는 않다. 병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삶의 어떤 이벤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병을 받아들이고 낫지 않는 병을 어디까지 끌고 갈지 다 아시는 것 같다.  

숨 차서 힘드시죠?’ ‘병이 그런건데 뭐 어쩌겠어. 원래 담배 많이 피워서 숨이 좀 찼어. 참을만해혹은 복수 때문에 식사 많이 하시기 힘드시죠?’ ‘늙은이가 많이 먹으면 못써. 그냥 조금씩 소식해야지. 다 이치에 맞게 살라는 하늘의 뜻이야혹은 밤에 잠이 잘 안오세요? 잠을 잘 주무셔야 몸 컨디션이 그럭저럭 유지되실 텐데요.’ ‘병원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지내는데 뭐 잠이 오겄어? 빨리 집으로 가는게 낫지. 퇴원시켜줘혹은 병이 쉽게 낫지 않네요. 어떻게하죠?’ ‘나 자식들 다 키워서 시집장가 다 보냈어. 죽어도 되. 그냥 고통만 없었으면 좋겠어. 할일 다 했으니 저승사자가 데려갈 날만 기다리고 있응게 걱정하지마. 괜찮아이 정도 대화가 오가면 내가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인지, 환자가 나에게 가르침을 주는 스승인지 잘 모를 지경이다. 현명한 노인들이 많다. 삶에 집착하지 않고 자기 삶을 정리한다. 끝까지 항암치료를 받겠다고 우기는 분들도 가끔 있기는 하지만, 대개 의식이 명료한 노인들은 자기가 치료를 종료할 시점을 아는 것 같다.     

 

그렇지만 내 또래의 젊은 암환자와 보호자를 대하기는 솔직히 힘들다. 환자도 보호자도 내 또래이니, 말 한마디도 조심해서 던져야 한다. 자칫하다간 나에게 자신의 분노를 투영(projection)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또래니까 말이다.

이렇게 자꾸 반복적으로 경기를 하시는 걸 보니, 의식이 갑자기 나빠지면서 심폐소생술이 필요한 위급상황이 올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뇌전이 상태가 심해서 심폐소생술의 의미가 없을 수 있습니다. 오늘밤이 고비가 될 것 같네요  우리 남편, 너무 잘 나가던 사람이었어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니까요. 정말 좋은 사람이었는데, 왜 내 남편만 이렇게 고통받아야 하나요. 제발 남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잘 좀 봐주세요라고 울부짖는 부인. 그 원통함에 내가 뭐라 드릴 말씀은 없으나 계속 울면서 억울해 하는 것에도 대책이 없다. ‘저 남이라고 생각하고 함부로 진료하는 거 아니라니까요!’라는 말이 마음 속에서 꿈틀거리기도 하지만 꾹 참는다. ‘우리 환자분은 이제 더 이상 항암치료를 유지하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해가 될 수 있어요. 그나마 남은 시간들을 의도치않게 단축시켜보리는 부작용이 예상되니 이제 항암치료는 하지 않는게 좋겠습니다’ ‘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직 애들이 초등학교에 입학도 안했는데, 애들 엄마 병이 나빠지는 걸 뻔히 알면서도 지켜보고만 있으라구요? 애들은 엄마없이 어떻게 지내라구요?’

 

병으로 가족을 잃는 슬픔에 대해 뭐라 긴 말이 필요하겠는가! 다만 죽음이 예상되면 난 환자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하는 편이다. 환자는 그 나이가 많건 적건, 죽기 전에 자신이 정리하고 싶은 것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의 빚, 남에게 진 신세, 가족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 꼭 보고 싶은 사람. 그런 마음 속 깊이 숨겨진 바램을 이루고 원망을 없애서 마음을 가볍게 해 주는 일, 죽어도 원이 없게 해주는 일이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의사는 이 환자는 말기암환자이고 회생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환자도, 정작 환자 자신은 자신이 결코 죽을 거라는 생각을 잘 안한다고 한다. 어떻게든 좋아질거라고, 이번 고비만 넘기면 좋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나이가 젊을 수록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지만 환자를 진료하다 보면 기본적인 생체 징후들이 흔들리는 경우, 혹은 금방 나빠질 것이라고 예상되는 순간들이 온다. 의사는 환자의 임종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환자와 가족들은 전혀 그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하면, 의사와 환자 사이의 의사소통에도 문제가 생긴다. 임종이 예상되는 경우 의사는 과도한 검사나 치료가 환자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환자를 편안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되는데, 환자와 가족들이 의사의 그런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왜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치료해주지 않느냐며 원망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난 현재 환자의 상태에 대한 인식을 가족들과 공유하고 어떤 시점부터는 적극적인 치료보다는 임종을 준비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더 필요한 상황이라고 명확히 말해 주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환자도 지금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되돌이켜 볼 시간을 가질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대부분의 가족들은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직접 환자에게 하느냐며 반대한다. 가족들이 반대하면 나도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는다. 삶과 죽음이라는 엄청난 주제에서는 의사인 내가 생각하는 것이 틀릴 수도 있으므로.

그렇지만 정말 환자가 가족들이 바라는 것처럼 죽음을 예상하지 못한 채, 죽음을 전혀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기를 원하는지에 대해서도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한번도 확인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결국 환자 자신이 아닌 가족들의 의견인 경우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나도 지금 내 눈앞에서 말기 증상으로 힘들어하는 환자에게 당신은 회생하기 어렵습니다. 돌아가실 가능성이 많으니 준비하실 일이 있으면 미리 준비하십시오이렇게 말하는 것은 정말 환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임종에 대한 준비는 별로 불편한 증상이 없을 때, 환자의 건강 상태가 나쁘지 않을 때, 의식이 명료하고 판단력이 명확할 때, 자신을 정리하고 필요하면 가족들과도 상의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임종을 어떻게 맞이할 것이냐를 준비하는 것이 치료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 는 않는다. 의사는 현대 의학의 범위 안에서, 과학적인 방법으로 치료의 가능성이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해 치료하고 환자는 체력을 유지하며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야겠다는 의지로 치료를 견뎌야 한다. 그렇게 열심히 치료받는 과정과 함께 죽음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도 조금씩 준비해야 한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 유지될지 모르는 나의 남은 인생을 더 잘 살 수 있게 도와주는 가장 핵심적인 방법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