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2009 내가 쓴 책

수현 11. 우울함은 당연한 감정

슬기엄마 2011. 2. 27. 11:03

우울함은 당연한 감정

 

한국 유방암의 특징 중의 하나가 유방암 발생 나이가 서양에 비해 10년 이상 젊다는 것이다. 아직 그 이유는 정확히 모른다. 여성의 결혼 연령이 늦춰지고 출산율이 떨어지기 때문에 이차적으로 호르몬 분비에 이상이 초래되어 그렇다는 가설이나 서구의 영향으로 인한 식생활의 변화와 생활 양식의 변화 때문이라는 가설도 있지만 아직까지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른다.

젊은 유방암 환자가 많다 보니 자녀들이 중고등학교 재학중인 경우가 가장 많고 유치원, 초등학교에 다시는 아이들이 있는 엄마들도 많다. 엄마 유방암 환자들은 자신이 유방암이라는 것에 놀랄 겨를도 없이 자식들 걱정부터 한다. 아이가 고3인데 시험기간이라며 항암치료 날짜를 늦춰달라고 하는 엄마도 있고, 치료 중인 자신의 모습을 아이들이 보면 충격을 받을 테니 계속 입원해 있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엄마들도 있다.

정상적인 감정이라면 누구나 암을 진단받고 우울하고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들 수 밖에 없다. 나을 수 있을까? 치료하는 것이 힘들지는 않을까? 내가 아픈 동안에 내 아이들과 남편은 누가 돌봐줄까?: 돈은 많이 들지 않을까? 어떤 의사에게 치료를 받아야 좋을까? 도대체 이런 병이 왜 나한테 생긴거지? 암은 치료해도 재발될 수 있다고 하던데, 나도 또 재발하면 어떻게 하지? 처음 암을 진단받으면 너무나 많은 생각들이 머리와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자신을 괴롭히게 된다. 치료방침을 결정하고 일정한 주기로 치료가 시작되어도 한동안은 자기에게 암이라는 병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다. 그러므로 암을 진단받은 환자에서 우울함과 정서불안, 적응장애 등의 정신적 불안함이 찾아오는 것은 어쩌면 존재적 상황 변화에 따른 당연한 감정의 반응일 수 있겠다.

그동안 남편이랑 사이가 좋지 않았다면 그것 때문에 후회가 심할 수도, 혹은 반대로 남편을 원망하는 환자들도 있다. 자신에게 생기는 않좋은 일들을 열거하며 자신의 비극적인 인생을 토로한다면 같이 슬퍼하고 이해해 주고 싶다. 비록 그녀의 푸념이 치료에는 전혀 도움이 안되겠지만 최소한 한번은 환자에게도 암환자로 진입하는 통과의례가 필요하니까.

진단과 치료 초반에는 남편과 아이들이 모두 힘을 합쳐 나를 위해 많은 일들을 분담하고 나는 치료에만 전념하라는 식으로 지극히 챙겨주는 것 같지만, 막상 치료가 수개월째 접어들면서 환자인 나는 점점 더 힘든 과정으로 접어들고 있고 하루하루 고통과 싸우는 것이 점점 힘들어져 가고 있는데 오히려 가족들은 이런 나의 상황을 망각하기 시작한다. 내 모습이 겉으로 크게 달라진게 없으니 예전처럼 엄마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 줄 것을 요청하는 통에 속상하고 섭섭하기 짝이 없다. 유방암 수술을 한 쪽의 팔은 자주 쓰면 붓기가 심해지는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설거지 한번 도와주지 않는 남편, 아침마다 늦잠자는 아이들, 학교에 지각하지 않게 깨우는 일도 힘이 들고 짜증난다. 처음에는 병원에도 데려다 주고 치료 부작용이 나타나지는 않는지 관심을 기울여주던 남편은 이제 병원에 데려다 주지도 않고 오늘이 항암치료 몇일째인지, 몇 주기 치료를 마치고 있는지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오히려 길게 투병중인 나를 귀찮아하는 것 같은 인상마저 풍긴다.  

 

유방암의 항암치료로 쓰이는 약제 자체가 뇌신경세포를 억제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우울감이나 정서적으로 기분이 나쁜 일이 더 자주 발생할 수 있다. 신경 기능의 변화나 항암제의 울렁거림으로 인해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면 낮에 항상 피곤하기 때문에도 기이 썩 좋지 않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기운도 없는데 유쾌할 턱이 있겠는가! 유방암 환자들이 치료중에 우울한 감정이 들고 이것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만약에 경제적으로 넉넉치 않은 살림이라 환자 자신도 가계에 소득이 될만한 일을 하고 있었던 사람이라면, 치료가 시작됨과 동시에 직장도 그만두고 소득도 없어지는 반면 치료비는 계속 나가면서 경제적으로 쪼들리는 생활이 시작된다. 치료 중간에 발생하는 소소한 합병증으로 예상보다 병원에 가는 일이 잦아지거나 응급실에 가서 한바탕 고생을 하고 나면 치료고 뭐고 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정서적으로 힘들고 외롭고 우울한데 이런 감정들을 제대로 발산하거나 완화시켜주는 탈출구가 없을 때 우울감은 극대화되고 심각해질 수 있다. 병이 생긴다는 것 혹은 암을 진단받는다는 것은 병의 정도를 넘어 그 자체로 인간의 몸과 마음을 약화시키고 힘들게 만든다.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조심스럽게 얽어 매어 살아가던 취약한 일상이 병에 걸림으로 인해 가족과 사회의 질서가 단숨에 깨져버리고 개인의 존재적 허약감이 드러나게 되는 잔혹한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적당히 잘 포장하고 살았던 나의 일상이 산산히 부서지고 나를 지탱해 온 신념들도 같이 무너진다. 그래서 암을 진단받기 전에는 그럭저럭 어려움이 있어도 현실을 유지하며 살 수 있었데 이제 더 이상 이들을 유지할만한 에너지가 없는 상태에서 혼란에 빠지게 되니 정서적으로 힘들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환자의 우울함이 포착되면 충분히 공감하고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어야 한다. 환자의 우울함은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 회복할 수 있는 긍정적인 일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의사와 환자 모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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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이나 미국에서도 아직 적극적으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는 영역, 그러나 점차 변화의 노력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영역이 바로 투병중인 암환자에 대한 정서적 지원과 지지 프로그램이다. 암환자 당사자 뿐만 아니라 환자를 둘러싼 가족 모두를 치료의 동반자, 환자에 대한 지지자로 만들기 위해 집단 치료의 개념으로 환자의 정서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이다.

암을 진단받고 시간의 변화에 따른 환자의 심리적 스트레스의 변화를 일괄적으로 추적관찰하다가  환자의 정서적 스트레스가 극대화되었을 때 적절한 정서적 지원, 그것이 정신과 진료일 수도 있고, 영적인 영역에서 신부나 목사, 스님 등과의 면담에서 종교적 지원을 받는 것일 수도 있다. 경제적 어려움이 악화된다면 사회복지 담당자와 연결해서 가능한 지원 프로그램을 찾아보는 노력을 하기도 한다. 생존기간이 긴 유방암은 그만큼 투병기간도 길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를 부정적으로 보면 살아있으되 여려가지 고통에 노출되는 시간도 길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더욱 적극적인 생존자 정서적 지원 프로그램이 모색되어야 한다.

 

우울함으로 힘들어하는 환자에게 혹은 우울증을 예방하기 위해 가장 쉽게 권할 수 있는 것은 정기적인 운동을 해보라는 것이다. 서서히 근육을 강화시킬 수 있는 피트니스를 해 보는 것도 괜찮고, 요가나 가벼운 조깅을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스트레칭도 제대로 배워서 매일 30분 이상 실천해 본다면 그것도 큰 운동이다. 치료 중에 땀을 많이 흘리고 격렬한 운동을 하는 것은 탈수나 전해질 이상 등 신체적 이상을 초래할 수 있으니 가볍고 손쉽게 할 수 있는 운동을 꾸준이 하는 것이 게 좋겠다. 중요한 것은 정기적으로 하시라는 것. 적당한 운동은 혈액순환을 돕고 몸을 상쾌하게 해주기 때문에 정서적으로도 우울감에 빠지지 않도록 도움을 주는 활동이 될 수 있다. 바깥 바람을 쐬고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전신을 움직이는 운동을 하는 것. 병으로 움츠러든 몸과 마음을 깨울 수 있다.

 

나의 병이나 건강 상태를 잊을 수 있는 다른 뭔가를 찾아서 집중해 보는 것도 좋은 선택이. 항암치료를 받고 방사선치료를 받는 기간 동안에는 신체적인 변화가 많이 생긴다. 하루하루 조금씩 변화가 누적되고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증상들이 발생하기 때문에 그러한 증상의 변화에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다. ‘이건 또 왜 이러지? 이런 증상이 생기는 건 괜찮은건가? , 이렇게 오래 증상이 계속 된 적은 없었는데, 뭔가 잘못된건가?’하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되며 그런 질문의 포로가 된다. 내 몸의 병과 건강이라는 주제를 잊고 집중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아 그 일의 목표를 세워서 조금씩 단계적으로 성취하는 기쁨을 찾기 바란다. 해결되지 않고 소모적인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축축 늘어져서 지내는 것 보다 잠시라도 나의 아픈 현실을 잊고 뭔가를 배워보는 것, 손을 놀리며 뭔가를 만들어보는 것, 집중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취미생활을 가졌으면 좋겠다. 생각보다 책읽기는 어렵다고들 한다. 활자가 눈에 잘 안 들어오고 집중력이 떨어져서 책 줄거리가 잘 그려지지 않기 때문에 책 읽는 것이 생각보다 더 큰 스트레스가 된다고 하니 굳이 애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악기를 배우거나 메이크업 화장술을 배우거나 꽂꽂이를 하는 것, 평소에 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먹고 사는 것에 영향을 주지 않는 사소한 것까지 배우느라 시간과 돈을 투자할 수 없어서 미뤄두었던 것을 큰 맘먹고 시작하시라.

 

그리고 무엇보다 정신과 진료를 받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갖지 않았으면 한다. 정신과 진료에 대한 거부감은 예전에 비해 많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나, 아직까지도 정신과 진료를 권유하면 환자들은 반발심을 갖게 되나 보다. ‘저 괜찮아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라며 정색을 하고 거절한다. 미국에서는 암을 진단받으면 애초부터 정신과 진료를 받고 정신과 의사와 면담기를 의무적으로 제기하기도 한다. 암을 진단받으면 마음 속에서 오만가지 걱정거리들이 생기고, 묻어두었던 감정의 골짜기에서 잊고 있던 예전의 아픈 감정들이 흘러나와 마음이 복잡해진다. 그럴 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도 좋지만, 바로 그런 상황을 현명하게 헤쳐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정신과 진료와 면담이니 적극적으로 활용하셨으면 좋겠다. 회진을 돌면서 오늘은 좀 어떠세요? 기분은 좀 괜찮으세요? 라고 일상적인 인사를 건네는데 고개를 푹 숙이거나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환자들에게 난 반드시 정신과 진료를 추천한다. 마음에도 감기가 드는 법이라고,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고, 그래서 컵에 물이 반쯤 차있는 걸 보고도, 보통때는 아직 물이 반이나 남았네라며 긍정적으로 생각할 상황을 겨우 물이 반밖에 안 남았네라며 비관적으로 생각해서 슬퍼하게 되는 거라고. 그러니 정신과 진료를 받는게 좋겠다고 추천한다.

정신과 진료를 받는다고 해서 누구나 약을 처방받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정신과 약을 일단 투여하게 되면 체내 농도가 유지되기까지 2-3주 정도 걸리기 때문에 최소한 몇 개월 정도를 복용해야 효과를 기대해볼 수 있겠다. 그걸 부담스러워 하는 환자들도 있은데, 기전이 명확한 건 아니지만, 정신과 약들은 항암치료를 하는 동안 발생하는 구토감을 억제하고 암으로 인한 통증을 경감시키는데 도움이 된다는 보고가 있다. 부작용이 심해 약을 견디기 힘들면 그땐 정신과 의사와 상의하여 약을 감량하거나 중단하면 된다. 나에게 힘든 일이 생기면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도전해서 이겨내겠다는 정신을 갖는 게 중요하지 않겠는가! 마음에 감기가 찾아오면 감기약을 먹고 이겨내자. 감기는 우리가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는 병이니까.